<사설>'起亞'의 금융시장 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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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재앙이 터졌을 때는 그 화근 (禍根) 이 오래, 그리고 복합적으로 쌓여온 것임을 간과 (看過) 해선 안된다.

그리고 재앙의 중심점에만 집착함으로써 재해 (災害) 의 진정한 범위를 축소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기아그룹 부도유예가 빚은 파괴적 충격은 순식간에 한국경제 전체에 미치고 있다.

금융.증권시장에서는 주가가 폭락하고 이자율이 폭등하고 있다.

해외 금융기관은 '한국물 (物)' 을 내다 팔고 원화가치는 급락하고 있다.

해외기채 (起債) 시장에서는 우리나라의 한 금융기관이 추진해 온 계약이 서명단계에서 취소되는 일도 생겼다.

지금 손을 써야 할 것은 한국경제 전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금융시장의 안정을 회복하는 것이다.

기아그룹에 대한 뒤처리는 기아그룹 자체보다 우리나라 금융시장 전체의 신뢰성을 복원하는데 초점을 두고 이뤄져야 한다.

기아계열의 한 금융회사에는 예금인출러시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이 그룹의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 아니 모든 금융기관으로 번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불행하게도 없다.

이를 막으려면 우선 한은과 재정경제원은 제일은행에 대한 특별융자문제에 지체없이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다.

제일은행은 최소한 2조원의 한은 특융을 필요로 하고 있다.

기아그룹이나 그 하청기업에 대한 각종 채권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반 저축자들과 금융기관들을 포함하는 시장 참가자들은 중앙은행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불안한 마음으로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최근 빈발하고 있는 대기업 그룹 부도.도산이란 재앙은 그 원인이 기업에도 있지만 원죄 (原罪) 는 누누이 말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부 규제에 있다.

'주인없는 은행' 은 정부의 산업정책과 금융간섭 아래서 '대출심사' 없는 대출을 금융관행으로 삼아 왔다.

'존재하지 않는 중앙은행' 은 오직 빈말로만 은행의 건전성을 되뇌어 왔다.

오래되고 복잡한 화근이란 바로 이것이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첫 걸음은 은행이 부도유예발표를 하기 전에 주식시장에서 기업 매수및 합병 (M&A) 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

경영실적이 나쁜 회사의 주가가 내려가면 새 주인이 그것을 매수해 살리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증권시장을 살리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은행.근로자.하청기업.일반 투자자를 갑작스런 부도.파산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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