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人文을 담는 그릇, 아름다움이 읽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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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01면

책 만드는 장인이자 예술가 윌리엄 모리스가 1896년 펴낸 『초서 작품집』. 오른쪽 페이지에 모리스의 출판 공방 켐스콧 프레스의 로고가 보인다. 작은 사진은 가죽 장정 표지. 신인섭 기자

책이 아름답다. 담긴 내용만의 얘기가 아니다. 33년째 책 만드는 일을 해 온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소장한 책들은 문맹이라도 감탄할 아름다움을 지녔다. 중세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의 작품을 다시 19세기 말에 인쇄한 『초서 작품집』이 대표적이다.

중앙SUNDAY 100호 특집 |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말하는 文字의 미학

정교하게 목판된 80여 편의 삽화, 활자를 배열해 리듬을 빚는 솜씨, 활자 하나하나의 장식성이 고루 어우러진 예술이다. 책 만드는 장인이자 예술가 윌리엄 모리스(1834~1896년)가 5년여에 걸친 노력 끝에 죽기 직전 펴낸 작품이다.

모리스를 두고 예술가 운운하는 건 과장이 아니다. 그는 사회운동가·시인·건축가이자 가구와 벽지 같은 일상의 소품까지 디자인한 공예가였다. 모리스가 1891년 출판 공방 켐스콧 프레스를 차려 펴낸 책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낸다. 김언호 대표는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으로 피해를 보았던 도쿄대에 미국 록펠러재단은 도서관을 지어 줬고, 영국 정부는 켐스콧 프레스의 전질을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그중에서도 『초서 작품집』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와 함께 탐미적 책 비평가들이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첫손 꼽는 대상이다.

책 만드는 사람인 김언호 대표가 이런 모리스에게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아름다움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이라며 “책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최고 지혜는 경험에서 나온다. 그 오랜 경험이 축적된 것이 책이다. 책에 담긴 진리·사상·이론이 호소력을 발휘하려면 아름다운 형식으로 표현돼야 한다”는 철학이다.

그는 나아가 “본래 그림과 문자는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상형문자를 떠올리면 쉬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의 삶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은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녀 달리 배울 기회가 없었다”면서도 “지금도 화랑이 눈에 띄면 무의식적으로 들어갈 만큼 그림은 내 본능적 관심사”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그는 1976년 말 출판사 한길사를 차렸다.『해방전후사의 인식』『로마인 이야기』 등 역작과 화제작을 두루 출간해 한국의 지성사를 이끌었다. 문화인 마을 헤이리와 파주출판단지를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입주하기까지 10여 년의 노력을 들였다. 그 사이 전 세계에 수십 차례 건축기행을 다녀왔다. 집과 책, 다시 모리스와 맞닿는 대목이다.

이 모든 관심을 그는 문자의 미학으로 수렴해 설명한다. “한글의 ‘ㅎ’이나 알파벳의 ‘A’가 집과 닮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한글은 한국인이 창안한 가장 빼어난 미학 체계이자 디자인 체계”라고 주장했다. “문자를 모아 책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미학적 본능”이라며 “내게는 책 만드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이니 “책을 중심으로 그림과 건축, 그리고 형식의 미학이라는 점에서 음악까지 어우러지는 행사를 열고 싶다”는 꿈을 갖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가 애장하고 있는 책들을 파주의 사무실과 헤이리의 자택에서 대충 둘러보는 데 2시간여가 걸렸다. 말 그대로 별별 책이 다 있다. 퇴임한 어느 노교수가 물려준 국내 희귀본 과학서적도 있고, 해외에서 구입한 19세기 서양의 책도 여럿이다. 서양 고전을 20세기에 옛 책처럼 고풍스러운 디자인과 장정으로 펴낸 책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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