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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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나는 신문 연재소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약속 장소로 나가 담당

기자를 만났다.

하지만 삼일 동안 고심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수락도 아니고 또한 거절도 아니었다.

일종의 역설적인 견해를 전달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약속장소로 나간 것인데,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신문사측의 요구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결론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헐벗은 플라타너스가 내려다 보이는 이층 커피숍, 주문한 두 잔의 커피가 날라져온 뒤에 나는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얘기한 게 대충 어떤 분위기를 지닌 소설이란 건 알겠는데… 연재 여부를 떠나 다소 엉뚱한 결론을 전하게 돼서 유감이군요. " "엉뚱한 결론… 이라뇨?" 손에 들었던 커피잔을 다시 내려 놓으며 사뭇 놀라는 눈빛으로 기자는 나를 보았다.

"신문사 측에서 원하는 것은 아마도 지금의 세태를 반영하는 소설을 써 달라는 것일 텐데… 그것이 자칫하면 종말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 본의 아니게 일조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소설이 사람들의 무뎌진 경각심을 일깨울 가능성은 있겠지만, 연일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건 기사가 소설적 재미와 충격을 훨씬 능가하는 세상인데 과연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온갖 신문 연재소설의 판세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니 흐름을 벗어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 뜻은 알겠지만 현실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니 어쩌겠느냐, 하는 표정으로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현실이 지금처럼 극도로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는 오히려 과거를 반추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사회적인 문제도 결국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쯤에서 한번쯤 지나간 시대의 사랑 풍속을 되새겨보게 하는 소설을 쓰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시 말해 '있는 것' 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보다 '있었던 것' 을 되새겨봄으로써 현실과의 극명한 대비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거죠. 격세지감같은 것이랄까, 그런 걸 통해 역으로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거죠. "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소설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소설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의 물음에 곧바로 응대하지 않고 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남겨진 커피를 마저 마시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낸 플라타너스를 내려다 보고, 그것도 모자라 담배까지 피워 물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마음에 품었던 역설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발설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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