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기조.비서실 축소 놓고 정부.재계 논쟁 가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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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부가 최근 '21세기 국가정책과제' 중 하나로 대기업 기획조정실.비서실의 법적 지위와 책임문제를 검토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정부.재계간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정부는 법적 근거가 불분명한 기조.비서실이 막강한 권한을 갖고 계열사 활동을 통제하면서 대기업들이 방만한 경영을 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재계는 이에대해 30대그룹 긴급기조실장 회의를 열고 "기업활동에 꼭 필요하니까 만든 기구" 라며 "차제에 기조.비서실의 법적근거를 위한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해 양성화해 줄 것" 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어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룹의 권부 (權府)' 로 불리우는 기조.비서실이 국내에 처음 등장한 것은 59년 삼성그룹이 비서실을 만들면서 부터. 그후 럭키금성 (현 LG) 그룹이 68년 기조실을 설립했고 선경 (74년).대우 (76년).현대 (79년) 그룹등이 뒤를 이었다. 이젠 30대그룹은 물론 웬만한 중견그룹들도 이같은 조직을 갖춘 상태다.

기획조정실.종합조정실.회장실.비서실등 기업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경제가 고속성장을 시작할 무렵 생겨나 재벌신화의 모태가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기업들은 기조.비서실을 만든뒤 이를 통해 ▶선진형 경영기법을 도입하고 ▶그룹의 인력과 자원을 역점사업에 집중시키며 ▶신규사업 진출을 통해 적극적인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삼성이 비서실의 아이디어로 공채등 선진형 인사제도를 국내 첫 도입한 것이나 선경이 80년 경영기획실 주도로 유공을 전격 인수하면서 섬유 일변도에서 벗어나 재계 랭킹 5위로 올라선 것등이 대표적이다.

각 그룹이 기조.비서실을 중심으로 그룹의 규모를 키우면서 결과적으로 나라경제의 압축성장에도 기여한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기조.비서실의 위상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6공당시 김종인 (金鍾仁) 청와대 경제수석등이 이 기구의 축소 또는 폐지를 추진한데 이어 문민정부 들어서는 더욱 고삐를 죄고 있다.

정부는 기조실을 창구로 한 대기업의 선단식 (船團式) 경영이 경제력 집중의 근본 원인이라는 시각이다.

기업들도 이에따라 기조.비서실의 기능 축소.조정에 일제히 나서고 있다.

삼성은 91년이후 지금까지 3 - 4차례의 비서실 축소작업을 벌여왔다.

대우는 95년 아예 명칭을 회장비서실로 바꾸고 계열사에 권한을 대폭 이양했다.

현대.LG그룹등도 계열사 통제가 아닌 지원.컨설팅 위주로 성격을 바꾸는 중이다.

이에따라 기조.비서실 인력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 최근 중앙일보가 30대 그룹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지난해와 올해 사이 30대그룹중 18개 그룹이 기조.비서실의 직원수를 줄였다.

늘린 곳은 10개 그룹에 그쳤다.

각 그룹이 최근 2 - 3년새 소그룹제를 잇따라 도입하며 자율경영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기조.비서실의 기능 축소와 연관이 있다.

기조실 인원은 10대그룹의 경우 1백명 안팎, 그 이하 30대그룹은 50명 안팎 정도. 특히 인사고과 상위 10~30%이내에 드는 우수인력 위주의 정예화된 조직이다.

기조실은 인사.재무.감사.기획팀등을 두고 계열사 경영에 직.간접으로 간여하고 있다.

계열사의 경영실적을 취합해 연말 인사에 반영하고 신규사업 진출이나 구조조정.자금조달등 주요 현안들을 챙긴다.

대기업들은 사업다각화를 통해 계열사수가 늘어나면서 비서.기조실을 총괄조직 형태로 운영해왔다.

따라서 이들 조직이 없어진다면 현재와 같은 그룹이라는 개념 자체가 엷어지게된다.

기조실 폐지문제가 나올때 마다 재계가 "사실상 재벌해체" 라며 강력히 반발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민병관.이수호 기자

<사진설명>

정부가 대기업 기조.비서실제도의 법적지위와 책임문제를 들고 나오자 30대그룹 기조실장들이 지난 7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긴급 모임을 갖고 지주회사 설립을 요구하는등 맞대응에 나섰다.

오동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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