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 궁금증 남는 황장엽 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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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에 있었던 황장엽 (黃長燁).김덕홍 (金德弘) 씨의 기자회견은 대체로 두가지 점에서 커다란 메시지를 국민에게 주는 것이었다고 지적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나의 메시지는 전쟁 위협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이른바 황장엽 파일과 관련된 것이 그것이다.

이 두가지 점에 대한 중앙일보의 기사 정리는 다른 신문과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었으며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기자회견에 관해 언급하는 까닭은 회견 내용과 함께 그 밑바닥의 어떤 흐름에 대한 신문의 냉철함이 요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사람의 회견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통과절차 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으레 밟는 절차를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밟음으로써 일차적으로 기자회견을 통해 마무리짓는 그런 관행을 따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형식에 있어서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할지라도 실제에 있어선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나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이렇게 느낀 까닭은 첫째로 장소 때문이었고, 둘째로 용어 (用語) 때문이었다.

종래 북쪽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경우 거의 대부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번엔 안기부청사 안에서 했다.

이것은 물론 황장엽.김덕홍 두사람의 신변 안전과 '무게'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장소문제는 그것이 어디가 됐든 간에 회견을 주관하는 기관의 의사와 형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국자가 어떤 용어를 쓰느냐 하는 것은 그냥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겨버릴 수만은 없을 것같다.

내가 특별히 용어를 지적하는 까닭은 용어와 개념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클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배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매스컴으로서도 결코 간과해선 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종전 (從前) 의 안기부가 주관한 기자회견에서 붙여진 현수막엔 예외없이 '귀순 (歸順)' 이란 용어가 쓰여졌었다.

한데 이번에는 '망명' 이란 용어가 쓰여졌다.

한글사전의 풀이를 보면 '귀순' 이란 '적이나 국가의 배반자가 반항심을 버리고 복종하거나 돌아오는 것' 을 일컫는 말이고, '망명' 이란 '자기나라에서 몰래 출국해 외국으로 몸을 옮기는 것' 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귀순' 과 '망명' 은 차원이 아주 다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아무런 공식해명 없이 '망명' 이란 용어를 당국이 공식적으로 쓰고 있고, 그에 대한 매스컴의 풀이가 없다는 것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경우가 '귀순' 이고, 어떤 경우가 '망명' 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적당히 쓰고 얼버무리는 따위란 적어도 신문의 입장에선 용납돼선 안된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하긴 黃씨 스스로도 '귀순' 이나 '망명' 이란 말을 어떻게 쓰든간에 개의치 않는다고 했지만 그런 자세와 그런 말의 속뜻이 무엇인지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黃씨가 주체철학을 정립한 학자고, 또 노동당비서겸 국제부장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어떤 용어의 개념이나 정의를 적당히 얼버무려도 된다고 생각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곡절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데 그것이 매우 궁금하다.

정작 더욱 궁금한 것은 그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남' 과 '북' 어느 쪽도 '조국' 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다고 밝혔던 점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독자의 지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정치지도자에 의해서도 문제가 제기된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 회견에서도 黃씨는 "조국이란 민족과 영토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는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하고 "어느 편을 들기 위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을 말하지 않겠다" 고 했다.

이런 말들은 그의 근본적인 생각의 바탕과 틀을 시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른바 사상의 전향문제와 관련해 결코 간과해선 안될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회견은 그가 말한 일반적인 메시지, 다시 말해 전쟁 위협과 황장엽 파일에 관한 것보다 그의 사상과 철학에 관한 것이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이고 그것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黃씨는 사상의 전향문제와 관련해 대충 네가지를 말한 것으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는 60년대말에 이미 마르크스주의에서 전향했다고 밝힌 점이다.

둘째는 이른바 주체사상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체철학을 만들었다고 밝힌 점이다.

셋째는 그 자신의 철학적 기초는 인본주의고 거기엔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넷째는 사상의 전향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밝힌 점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앞뒤의 연결과정을 잘 알지 못하고선 확실한 전향인지의 여부를 쉽사리 알 수 없게 하는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黃씨는 주체사상의 죄과를 뉘우치고 지금 분명 남쪽에 와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 사상의 전향을 했는지를 확실히 밝혀야할 과제를 관계당국 뿐만 아니라 매스컴이 떠안게 된 것 또한 사실이란 인식이 있어야 할 것같다.

이규행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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