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세기를찾아서]24. 모스크바와 크렘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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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20세기를 통하여 이 말보다 영욕(榮辱)을 함께 했던 말도 없을 것입니다. ‘악의 제국’과 ‘음모의 밀실’이었는가 하면 사회주의의 이념을 실현한 혁명의 고장이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이제 그러한 극단의 언어들도 20세기와 함께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러시아혁명과 함께 20세기를 열었던 이곳은 이제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20세기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로 오는 길은 멀었습니다.그것은 마치 한 세기를 상대해야 하는 육중한 무게를 갖는 것이었습니다.나는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바깥을 지켜보았습니다.가는 빗줄기가 사선을 긋고 있는 창밖으로 모스크바는 무성한 숲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짧은 여정 동안에 어디서부터 무엇을 찾아야 할지 막막하였습니다.나는 모든 방문자들이 하듯이 ‘붉은 광장’에서부터 시작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광장은 어제 내린 비로 말끔히 씻겨 있고 크렘린궁의 주벽(周壁)에는 아침 햇살이 눈부십니다.모스크바강을 배경으로 양파머리를 이고 있는 성바실리 사원의 아름다운 모습과 주벽의 망루인 스파스카야 시계탑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동화와 같은 알라딘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광장의 곳곳에는 모스크바의 역사가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농민봉기를 이끌었던 스텐카 라진의 처형대가 그대로 남아 있고 레닌 묘에는 방부처리된 레닌의 유체가 부분조명 아래 백랍인형처럼 누워 있습니다. 불타는 크렘린을 등지고 폭설 속을 철수하던 나폴레옹의 모습에서부터 성벽 안쪽의 정부청사에 앉아 있는 옐친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명멸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들이 떠오릅니다.결코 동화의 세계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광장의 이곳저곳에서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는 관광객들의 한가로운 모습은 역시 변화하고 있는 오늘의 러시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모스크바 시내에는 곳곳에 건물의 1층을 상점으로 바꾸는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물건을 사기 위하여 길게 늘어섰던 ‘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이제는 비싼 물건값을 치를 돈이 없습니다.

냉전의 세기를 이끌어 왔던 러시아가 급격한 변화의 과정에 있는 것은 도처에서 쉽게 확인됩니다.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당신에게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그리고 몇 그루의 나무에 관한 이야기로 숲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과 개방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러시아 사회가 5%의 특권부유층과 10%의 중산층 그리고 절대다수인 85%의 소외계층으로 재편(再編)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편’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먼저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일정한 권력주체의 변화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층 내부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변화에 대한 무수한 논의는 상층 5%에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변화와 재편은 헤게모니그룹 내부의 협소한 이동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85%의 소외계층은 과거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변화는 ‘방법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래의 이념적인 방식으로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었던 체제가 이제 그 지배기제를 시장메커니즘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주의 이념이라는 최고강령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온 이 85%의 인민이 이제 시장메커니즘이라는 낯선 장치 속에 던져지고 또 다시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지않아 5%의 노브이 루스키(新興 러시아人)를 핵으로 하여 신흥자본가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위로는 초국적(超國籍)자본과 결합하고 아래로는 마피아라는 불법집단의 합법적 부분과 유착된 구조가 형성될 것입니다. 자국자본(自國資本)이라는 개념으로 개혁의 주체성을 지키려 하지만 자본에는 원래 국경이 없으며 자본 고유의 운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주공학연구소의 연구원에서 해고되어 운전기사로 거리에 나온 안드레이는 개혁은 ‘저들의 일’이라는 냉소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혁의 주체이며 그 주체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당신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더구나 민의(民意)를 수렴해내는 하의상달(下意上達)의 통로가 닫혀 있을 때 그것이 어떠한 과정을 밟게 될 것인가는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개혁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개혁이 어떠한 과정을 밟아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모스크바에는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권에 개입하는 마피아의 이야기가 무성하고 아르바트 거리의 유럽풍 카페에서는 록 음악이 무성합니다.그러나 이처럼 급속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단 한가지 변함없는 것은 85%의 계속되는 희생입니다.직장을 잃고 사회보장이 줄고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과거에 노력동원의 풀(pool)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들은 저임금 노동력의 풀이 되어 5%의 투자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을 뿐입니다.

젊음과 정열을 희생해온 노인들의 자존심은 지하철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당신은 모스크바의 지하철에서 서슴없이 젊은이들을 일어서게 하고 당당하게 좌석을 차지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존심의 모습이 당신의 마음을 착잡하게 할 것입니다.

안드레이는 책으로만 배웠던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이제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장(市場)’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장과 자유, 경쟁과 평등이 결코 동의어가 될 수 없으며 민주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모스크바대학에서 언덕을 내려와 강변에 있는 한산한 승선장에서 배를 탔습니다.모스크바강은 북서방향으로 비스듬히 누운 을자강(乙字江)입니다.강물이 크렘린에 가까워지자 한 자락을 여투어내어 크렘린에 닿습니다.나는 배에서 내려 멀리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강물은 러시아의 역사가 겹겹이 지층을 이루고 있는 크렘린 광장과 한동안 속삭이다가 다시 멀리 볼가강을 향하여 떠나갑니다.‘러시아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볼가강에게 오늘의 모스크바를 무어라 일러줄 지 궁금하였습니다.드넓은 대지를 유유히 흐르고 있는 볼가강이 무어라 대답할 지 궁금하였습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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