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 아동’ 전문가가 진술 돕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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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아동 성폭행은 ‘성적 살인(Sexual Homicide)’의 종착역이다. 지난해 사형 선고를 받은 정성현(40)은 안양 초등생 혜진·예슬이를 살해하기 이전에 성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강호순(38)이 붙잡히지 않았다면 미성년자로 피해자가 확대됐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아동 상대 성범죄 확대를 막기 위해 ‘전문가가 아동의 진술을 조사·분석하는 제도’가 만들어진다. 경찰청은 3월부터 13세 미만 성범죄 피해 아동을 위한 ‘전문가 참여제’를 시범실시키로 했다고 4일 밝혔다. 한국심리학회는 경찰과 업무협약을 맺고 범죄심리사 등 전문가를 제공한다. 경기대 이수정(범죄심리학) 교수팀은 분석 프로그램 개발을 맡았다.

특히 최영희 민주당 의원과 이은재 한나라당 의원은 “아동성폭행 피해자 조사 때 전문가가 참여하고, 이를 검찰과 법원이 의무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법률 개정안을 2월 국회에서 발의한다”고 밝혔다. 나이가 어려 진술이 힘든 피해 어린이를 위해 ‘전문가 대변인’이 생기는 것이다.

◆진술의 덫에 걸린 피해 아동= 2007년 3월 17일, 김영선(가명)씨는 딸 수연이(가명·당시 5세)의 팬티에 피가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성기에는 좁쌀만 한 돌기가 솟아 있었다. 산부인과 전문의는 성병의 일종인 ‘콘딜로마’에 감염됐다고 진단했다. 김씨는 아동성폭행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아 “성폭행이 확실하다”는 소견도 받았다. 딸은 학원 운전기사를 가해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서부지법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을 맡았던 판사는 “아이 진술에서 (성폭행)시간·장소가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런 경우 판사 개인의 판단과 심증에 의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조인섭 변호사는 “나이가 어릴수록, 반복적으로 진술할수록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진술을 한 번만 해 피해 아동의 정신적 피해를 줄이자’는 취지로 2004년 진술녹화제가 도입됐지만 한계가 있다. 검찰과 법원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아동 조사가 여러 차례 반복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아동 눈높이 맞춘 대변자 필요=어린이의 눈높이 조사와 진술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종종 무시된다. 경찰청 이금형 여성청소년과장은 “판사가 5세 여아에게 ‘저 남성이 네 대퇴부를 만졌니’라고 묻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객관성 확보도 과제다. 이수정 교수는 “아동의 인지 능력 파악, 진술의 신빙성 판단, 최종 보고서 작성 등을 ‘객관화된 시스템’으로 완성할 필요가 있다. 핵심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공정성의 확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학회에서 추천한 전문가를 법원이 심의를 통해 인증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최영희·이은재 의원은 “지난해 성폭행 피해 아동이 1200명 수준이다. 2억~3억원만 들여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강인식·김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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