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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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가 만들어야 할 다큐멘터리는 선생님과 무관하지 않아요.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전화를 드린 거고,전화를 드렸으니까

용건을 끝까지 말씀 드리고 싶어요.선생님이 작년에 중단하신 신문 연재소설,그 제목이'첫사랑'이죠?”“그게 어쨌다는 거요?” 여자가 좀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그녀가 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아 나는 몹시 불쾌한 심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제가 만들어야 할 다큐멘터리도 그것을 다루는 거예요.”“첫사랑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그런 말이오?”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나는 되물었다.

“그것 한편을 독립시켜서 제작하는 게 아니라 1900년대를 되짚어보는 전체 10부작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는데,그중 마지막 항목으로 그것이 채택되었다는 거예요.서기 2000년을 맞이한 특집 기획물인데… 보다 상세한 내용은 나중에 만나서 말씀 드릴게요.이것이 제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약점은 있지만,어쨌거나 전 선생님이 중단하신'첫사랑'이라는 연재소설을 읽고 나서 뭔가 그 부분에 대해 할 말이 많으신 분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그랬기 때문에 연재를 중단하고 절필 선언까지 한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나름대로 했구요.”

“판단과 주관이야 이예린씨 몫이니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내가 설명해야 할 의무도 전혀 없구요.이예린씨가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주관으로 나를 생각했건 간에,분명하고 확고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송출연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다,그런 것이죠.”딱 부러지게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며칠 전에 끓여먹은 무우국 생각이 났다.채를 썰기 직전,식칼로 먼저 탁,탁,탁,무우를 토막낼 때의 삼빡하던 절단감이 되살아난 것이었다.간단히 말해 더이상

그녀와 채썰기 같은 대화를 나누기가 싫어진 것이었다.무우를 토막 내는 것 정도는

건성으로 할 수 있지만,채썰기 같은 건 결코 장난삼아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 마흔 셋이 되도록 독신으로 살아온 내가 어찌 그런 것을 모를까. 나의 결연한 태도에 질려 버렸는지 그녀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침묵이 그녀와 나를 어색하게 옥죄고 있었지만,내가 먼저 입을 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버팀목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어떤 식으로든 이제는 그녀가 마무리를 해야 할 차례라는 걸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는데,정작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나의 기대감을 보기좋게 무시해 버린 것이었다.호락호락 물러서지는 않겠다는 부드러운 경고의 말.“날씨가 너무 화창하죠?다시 전화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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