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청와대서 부터 샌 나라기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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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박영환(朴榮煥)비서관은 청와대에서'잘 나가던'민주계 출신이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통일민주당 총재로 대선에 출마했던 87년 홍보지원 업무를 맡았다.

현정권 출범부터는 줄곧 보도지원을 담당하면서 1급까지 올랐다.학력 위조 시비도 그럭저럭

넘길만큼 수완도 좋았고,金대통령의 새벽 조깅 멤버로'실세(實勢)'행세도 했다.

그런 朴비서관은 늘 그랬듯 지난달 22일 시작한 金대통령의 유엔.멕시코 방문때 수행원으로 따라 나섰다.그런데 그가 뉴욕에서 대오를 이탈했다.

전말은 이렇다.

金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26일 오후(현지시간)회담과 관련,“무리하게 클린턴과 만나려고 저자세 외교를 편다”

“뚜렷한 현안도 없는데 만날 이유가 뭐냐”는

비판조 기사가 서울쪽에서 나왔다.朴비서관은 발끈했다.그는 기자실에 나와“근거없는 내용을 마구 써도 되느냐”며 고함을 지르고“더 이상 임무를 못맡겠다.사표낸다”고 말했다.

직속상관인 윤여준(尹汝雋)대변인이“참아라.정 사표를 내려면 서울에 돌아가서 하라”고 말렸고,김광석(金光石)경호실장도 달랬다.그러나 그는 이를 뿌리치고 27일 뉴욕에서 일반기 편으로 귀국해버렸다.이 사실은 30일 순방이 끝날 때까지 金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이후 朴비서관은 청와대에 복귀했다.동정론도 여권 내부에 있었다.

하지만 청와대 안팎에서“군으로 치면 장교 탈영사건이다”“민주계 출신은 직무유기해도 되느냐”는 불만이 터져나왔다.가뜩이나 대통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판인데 국가기강이 청와대에서부터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잇따랐다.어떤 형태로든 징계를 안할 수 없게 됐다.

김용태(金瑢泰)비서실장.문종수(文鐘洙)민정수석등은“공직기강 차원에서 다스려야 한다”고 결론내리고 3일 사표를 받았다.그의 행태를 놓고 청와대 일각에선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얘기도 나온다.요즘 金대통령은 언론에 대해“오보가 많은데 정정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한다.朴비서관이 金대통령의 그런 심정을 염두에 두고,내년 2월에 어차피 그만둘텐데 이쯤에서 사표를 던져 충성을 표시하는 돌출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외국 방문중 수행원의 이탈은 역대 정권 어느때도 없던 사고다.어떤 판단에다,무슨 분위기에 휩쓸려 그런 행동을 했건 청와대부터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지적에 할 말이 없게 됐다.민주계 출신 朴비서관의 행동이 바로'임기말 현상'이다.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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