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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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말씀하세요.제가 이본오입니다.”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내려다보며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안녕하세요,하고 거의 엉겁결인

것처럼 여자가 인삿말을 건넸다.

그러고는 호흡을 가다듬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는 ABS방송국의 특집제작국에 근무하는 이예린 프로듀서예요.찾아뵙고 용건을 말씀 드리는 게 예의일 텐데….선생님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몰라 이렇게 전화부터 먼저 드렸어요.제가 잠시 시간을 빼앗아도 괜찮을까요?”“별 상관 없습니다.말씀 하세요.” 아무리 예절 바르게 덤벼도 결과는 마찬가질세,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탁자위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간단히 말씀 드릴게요.이번에 제가 맡게 된 특집 다큐멘터리에 선생님을 출연시키고 싶어서 전화 드린 거예요.보나마나 거절하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드린거니까 뭐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거예요.단단히 각오가 돼 있거든요.”“이것 보세요,이…” 건성으로 들어넘긴 그녀의 이름이 퍼뜩 되살아나지 않아 나는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채 엄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눌렀다.

“이예린요.”“아,그래요,이예린 씨!저에게 전화를 건 용건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저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 같네요.무엇을 다루는 특집 다큐멘터리인지는 모르겠지만,어쨋거나 전 방송같은 것엔 전혀 출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이제 됐죠?” 그녀가 마치 내 앞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말을 하고 나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단단히 각오를 했다면서도 그녀는 결연한 나의 태도에 당황한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하지만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엉뚱한 말로 나에게 일격을 가했다.

“절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그런 뜻인가요?”“무관하진 않죠.하지만 절필을 하지 않았다 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을 거예요.한마디로 말해,노! 왜냐하면 그런 건 내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죠.다른 건 몰라도 내 자신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애써 태연을 가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뱉은 말 속에서는 딱딱한 뼈가 느껴졌다.하지만 오래 끌어봤자 짜증스러워지는 일밖에 없을 텐데,그런 상대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랴.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나의 인성에는 이제 물렁뼈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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