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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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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통령이 ‘전직(前職) 대통령’으로 전직(轉職)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조차 임기 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후임인 존 F 케네디의 취임식을 위해 세워지는 관람석을 보며 “마치 나를 처형하려는 교수대 같았다”고 고백했다. 관직을 떠나는 건 실연과 흡사하다는 말도 있다(딘 애치슨 미 전 국무장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 자리를 내놓자면 사랑보다 더한 목숨을 앗기는 심정이 들 법도 하다.

그래도 다들 어찌어찌 여생을 꾸려갔다. 실연엔 새로운 사랑이 약이듯 새로운 쾌락이 권력의 빈자리를 메웠다. 돈벌이가 대표적이다. 빌 클린턴의 사례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해 부인 힐러리의 대선 출마 때 그는 퇴임 후 8년간 부부가 1억900만 달러를 벌었다고 신고했다. 요즘 환율로 치면 15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하지만 단시간에 제일 많은 돈을 번 이는 아마 로널드 레이건이 아닐까 싶다. 1989년 일본에서 20분짜리 강연을 달랑 두 번 해주고 200만 달러를 받았다. 시급(時給)도 아닌 분급이 5만 달러나 되는 셈이다. 불명예 퇴진한 리처드 닉슨의 잔여 임기 2년 반을 때우고 전직 대통령 반열에 오른 제럴드 포드가 이 분야 선구자라 할 만하다. 그는 퇴임 후 여러 기업의 이사진에 참여해 많던 빚을 다 갚고 3억 달러에 달하는 부를 축적했다. 인생역전이 따로 없다. 세간에 비난이 일자 “난 이제 평범한 시민인데 뭐가 문제냐”고 대꾸했다고 한다.

물론 돈벌이보다 고상한 일에 매진한 사람도 많다. ‘가장 성공한 전직 대통령’으로 유명한 지미 카터처럼 말이다. 집 없는 사람 집 지어주고 여기저기서 분쟁 해결사로 맹활약해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재임 시 ‘2차 대전 후 가장 실패한 대통령’ 소릴 듣던 한풀이를 제대로 했다.

얼마 전 물러난 조지 W 부시도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할 터다. 패자 부활전의 신화를 쓴 카터의 길을 좇는 게 좋아 뵈지만 어차피 이라크전 탓에 노벨상은 그림의 떡일 테니 김이 좀 샐 게다. 차라리 과거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주였던 이력을 살려 ‘야구계의 대통령’이라 할 메이저리그(MLB) 커미셔너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훈수했듯 쿠바의 권력자 카스트로 형제와 만나 커브와 슬라이더를 논하며 ‘야구 외교’도 펼치고 말이다. 하긴 뭘 하든 희미한 옛 권력의 그림자에 취해 끊임없이 나라에 분란이나 부추기는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보다야 나을 것이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