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김석기를 살려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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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번 사건에는 상반된 두 가치가 맞물려 있다. 법치와 동정심이다. 민주주의를 하자면 법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법은 공정해야 한다. 법이 공정치 못하면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 저항권이다. 야당이 국회에서 망치를 들고 폭력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통과될 법들이 악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MB악법’ 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고, 반대를 위해 폭력을 행사해도 무방하다는 논리다. 이번 사건도 개발이익은 땅주인과 건설업자가 다 차지하고 세입자들은 맨몸으로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으니 법이 공정치 못한 데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폭력으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도 동정을 받을 만하다. 따라서 세입자의 권익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이제부터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현 법체제에서는 세입자의 권리가 그 정도뿐이니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법치라는 것은 계약의 준수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이미 법의 차원을 떠나있다는 데 더 문제가 있다. 분열된 사회일수록 법으로 다루어야 할 사안을 이데올로기로 판단한다. 이 사건을 놓고 사회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아니 우리 사회는 이미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쪽은 지난번 쇠고기 촛불시위처럼 나라를 한 번 더 흔들려 벼르고 있고, 다른 쪽은 법치가 무너진다고 신문광고를 내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무슨 이슈든 이처럼 편짜기로 갈라진다. 이러니 우리 사회에서 타협이란 단어가 통하지 않는다. 한쪽을 택하면 거센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 다가올 봄에 다시 촛불시위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정권은 그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가장 손쉬운 선택은 ‘경찰청장의 책임을 물어 사퇴시키고 폭력 참가자도 엄벌한다’는 양비론적 해결이다.

이번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하나의 분수령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법치와 저항권은 민주국가에서 둘 다 필요하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있다. 그 우선순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독재의 시대라면 저항권이 우선될 수 있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를 ‘독재 정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를 향해 들고 일어나라는 메시지다. 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는 저항권이 아니라 법치라고 생각한다. 이 정부가 잘못한 일도 많았지만 외국에 나가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대한민국이 독재 정부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부족한 것은 저항 정신이 아니라 법치 문화다.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과 법이 대립할 수는 없다.

경찰청장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두고두고 이 나라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앞으로 경찰청장의 목은 데모대가 쥐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질서 유지를 맡길 것인가? 이번 사건은 여야가 타협할 사안이 아니다.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타협한다면 겁쟁이 소리만 들을 뿐이다. 우리의 원칙은 무엇인가. 법을 존중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결정을 검찰로 미룰 것이 아니라 희생을 각오한 스스로의 결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저항이 따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용기의 본질은 자기 희생이다. 용기는 고함을 치거나 얼굴을 굳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면 지금까지보다 오히려 훨씬 더 부드러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순교자의 얼굴이 온화하듯이 말이다. 여든 야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를 감쌀 수 있어야 한다. 용산에서 희생된 김남훈 경사 아버지의 말처럼 “미워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가슴 아픈 악순환의 고리는 우리 남훈이로 끝나야지요. 서로 용서해야지요.” 바로 이런 마음이 민주주의 할 수 있는 마음이다. 민주주의는 부드러운 법치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