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위기론에 대한 과민반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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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은 치열했다. 석유파동 때문에 크게 어려워진 경제를 두고 당시의 레이건 후보는 '공황(depression)'이 임박한 위기 상태라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재선을 노리던 카터 대통령은 당시 상황이 '경기후퇴(recession)'일 뿐 공황은 아닌데도 경제에 대한 지식이나 분별력없는 사람이 위기를 과장한다고 반박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던 레이건의 응수가 재미있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경제현상에 관해 정의를 내려주겠다. 옆집 사람이 실직하게 되면 경기후퇴라고 한다. 내가 일자리를 잃게 되면 공황이 된다. 그렇지만 카터 당신 목이 달아나면 그때는 경기회복(recovery)이 되는 것이다."

경제 국면을 판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며 용어에 관해 엄밀한 정의가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상이한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때문에 떠들썩해진 경제위기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 현 상황이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단정하면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지표상으로는 대규모 무역흑자, 16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 개선된 기업이익과 재무구조, 5%를 넘어설 올해 성장률 등을 들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정확한 진단없이 숨겨진 의도를 갖고 과장된 위기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그들이 오히려 경제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대통령의 연설 이후 진행되고 있는 찬반논쟁을 보면서 정부가 위기론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난 1년간 신문 지상에서 경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은 높았지만 우리 경제가 97년 외환위기와 같은 위험에 처해 있다거나 곧 그런 위기가 닥친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논객들은 산적한 경제과제를 안고 한국 경제가 침체해 가는데도 이를 막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미진했던 점을 걱정하고 비판해 왔다고 본다. 결국 음모적 위기론을 편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들에 대해 경고한 격이 되지 않았나 싶다.

설령 위기 과장자들이 다소 있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그렇게까지 관심을 갖고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경제에 관한 판정은 이런 소수집단이나 정부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이에 참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인투자가나 해외의 평가기관.금융기관.연구기관들도 제각기 객관적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장된 위기론이나 부풀려진 낙관론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는 얘기다. 정부로서는 개혁저지 세력의 음모를 찾아내기보다 경제논리에 맞는 개혁정책을 들고 나와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는 한편 기득권 세력을 설득해 가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위기론이나 불확실성의 진원지는 정부 자신이라는 감이 든다. 지난 40년간 가장 성장률이 낮았던 3개년을 뽑아 보면 80년, 98년, 그리고 지난해다.

첫째와 둘째해에 한국 경제는 완벽한 위기를 체험했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도 심각한 경제난이 진행된 지난 한해 동안 정부는 무엇을 했던가. 경제보다는 정치가, 행동보다는 말이 앞서지 않았던가. 정부 측의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남을 탓하지 않고, 일관된 정책방향을 견지하면서 경제논리를 바탕으로 과제를 풀어가겠다는 정부의 자세를 국민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경제는 본격 회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고, 위기론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노성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