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6.25와 북한의 전쟁도발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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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시정(市井)에서는 북한의 전쟁도발설이 설왕설래하고 있다.“위기에 몰린 북한이 국면전환을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걱정이다.마침 오늘은 한국동란 발발 47주년인 만큼 북한이 과연 제2의 6.25를 시도할 수 있을지 따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1950년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 사이에는 차이가 크다는 사실이다.국제적으로,그때는 냉전이 고조되던 시기로,군사동맹을 맺은 소련과 중국이 모두 북한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했으며 3자 사이에는 남침계획에 대한 합의가 존재했음에 반해 미국은 주한미군의 완전철수를 끝냈을 뿐만 아니라 애치슨 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시키기까지 했다.국내적으로,북한이 한국보다 여러 방면에서 우세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국제적으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러시아와 중국은 모두 한국과 수교했을 뿐만 아니라 협력을 증진시키고 있는 반면 북한의 무력도발은 억제시키고 있다.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대한(對韓)방위공약은 굳건하다.국내적으로,한국의 대북(對北)우위는 군사방면을 비롯해 여러 방면에서 확고하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특히 식량위기로 압축된 경제적 파탄에 직면한 북한이 굶주린 백성들을 끌어안은채 전쟁의 길에 들어설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다.어떤 서방 기자는 북한을 방문한 뒤“북한 사람들은 너무나 못먹어 김정일(金正日)타도를 외칠만한 기력조차 없어 보인다”고 썼는데,그렇게 기운없는 국민들이 아무리 북한군부가 속전속결의 단기전(短期戰)을 노린다고 해도 전쟁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지만 일부 전문가들이 경고하듯,북한이 자포자기의 심리에 빠져들게 되면 한국을 상대로 동반자살의 길을 걷게 되지는 않을까.

이 물음에 대해 필자는 북한이'막가파'의 길을 걷게 될 개연성은 아주 낮다고

말하고 싶다.세계역사상 패배와 자살을 예견하면서 전쟁을 일으킨 예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그러나 북한은 워낙 예외적인 존재이고 예측불가능의

상대인 데다가,비록 그 개연성이 1%만 있다고 해도 결코 방심할 수는 없다.

확실히 북한은 모든 방면에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가장 심각한 것은

특히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사이에서부터 급속히 진행돼온 북한의 체제적

위기가 내년,후년이라고 해서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있다.바꿔 말해

내일에 대한 희망의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 북한의 가장 심각한 위기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통치자들은'절망자(絶望者)의 힘'을 행사해

왔다.“너희에게는 잃을 것이 너무나 많지만 우리에게는 잃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그래서 우리는 너희를 상대로 이판사판으로 막 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말로나 행동으로 전달함으로써 상대방을 주춤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겁을 주는 방식이 그것이다.북한은 남쪽에 엄청나게 큰

상처를 주기에는 충분한 파괴력을 갖고 있기에 '절망자의 힘'을 경시할 수

없게 된다.이것은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일종의'악성(惡性)외교'이며'더러운

외교'이기도 하다.따라서 대응책 역시 복합적이어야 하고 고단수(高段手)여야

한다.

우선'이에는 이로,눈에는 눈으로'맞선다는 군사적 결연함을 일관되게 보여야

한다.우리 사회를 민주와 복지의 차원에서 건강하게 만들어 결코 얕잡아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동시에 이번G8 덴버 정상회담이 요구했듯 4자회담과

남북대화의 개최를 계속해서 제의해야 한다.

그러나 독을 바른 칼을 마구 휘두르는 상대방에게 한차례라도 찔리지

않으려면 우선 광목을 수없이 던져 그 칼을 감싸버림으로써

무력화(無力化)시키듯,우리는'절망자'에게 경제원조를 베풀어 강포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것도 슬기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평화의 화(和)자가

나락(禾)이 입(口)에 들어간다는 뜻인 것도 새겨볼만 하다.

김학준 인천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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