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93>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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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호 16면

대한민국 야구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할 사람을 꼽으라면 ‘인사이드’는 김응용을 선택하겠다. 선동열도, 박찬호도, 그렇다고 한국 야구의 아버지 이영민도 아닌 김응용? 그러나 읽어보자. 김응용이 지닌 정체성은 한국 야구를 가장 잘 대변해준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가, 살아남은 자가 강한가

 평남 숙천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 때 월남한 이산가족이다. 조국의 아픔을 지닌, 태생적 상징성을 가졌다. 그는 피란 시절 부산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그는 대학생보다 은행원이 성공했다고 평가받던 시절 한일은행에 입사했다. 그리고 ‘수출만이 살길이다’고 했던 박정희 정권과 함께 아시아의 거포로 성장했다. 그가 버틴 한일은행과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이 이끄는 롯데가 만나던 1970년대 후반의 동대문구장은 한국 야구의 메카였다.

  전두환 정권 초기에 태동한 한국 프로야구 출범 때 김응용은 설 곳이 없었다. 6개 구단 어디서도 그를 감독으로 ‘모셔 가지’ 않았다. 그는 그 개인적 위기를 ‘야구 유학’이라는 선구자적 혜안으로 돌파했다. 야구 유학이란 말이 있지도 않았던 그 시절에, 그는 미국 메릴랜드 모 대학에서 연수를 했다. 프로야구 시즌 도중 그는 주위에 알리지 않고 국내에 들어와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봤고 “그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서글펐다”고 했다.

 절치부심하던 그는 83년 프로야구 감독이 됐다. 그를 불러들인 팀은 해태였다. 해태 초대 감독이 그가 실업야구 시절 쌍벽을 이뤘던 김동엽이었으니 이 또한 흥미 있는 인연이다. 그가 팀을 맡고 나서 해태는 무려 여섯 번 우승했다. 해태는 용맹했고 강렬했다. 시대의 상징이었다. 해태가 이기는 날 관중석에서는 ‘목포의 눈물’이 울려 퍼졌다. 그 해태의 야구는 김대중 정부 때까지 순항했다.

 김대중 정부 한창 때, 2000년 10월이다. 영원히 해태의 심장일 것 같던 김응용이 호남을 떠나 영남으로 갔다. 대구의 삼성. 그의 붉은 유니폼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류’ 삼성은 그 숙원을 풀기 위해 김응용을 모셔 갔다. 김응용에게 긴 시간은 필요 없었다. 그의 삼성은 거푸 한국시리즈에 올랐고 2002년 기어코 챔피언이 됐다.

 김응용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세대 교체의 흐름은 비켜가지 못했다. 선수로서, 코치로서 그를 지켜주던 ‘국보’ 선동열의 차례였다. 그는 2004년 시즌이 끝나고 유니폼을 벗었다. 그는 그렇게 무대 뒤로 사라지는가 했다. 그러나.

 그는 변신했다. 우연인가 운명인가. 세상은 2003년에 노무현의 참여정부로 바뀌어 있었다. 대통령과 프로야구 총재, 삼성의 실세와 김응용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모두 부산상고 동문이었다. 김응용은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이 됐다. 그리고 프로야구 이사회에서, CEO 김응용은 신상우 총재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가 됐다.

 2008년 또 한 번 새 정부가 들어섰다. 신상우 총재도, 노무현 대통령도, 그리고 힘을 주었던 삼성의 실세도 모두 떠났지만 사장 김응용은 건재하다. 장원삼, 선수 도박 파문도 김응용을 비켜갔다. 국내 최정예 조직이라는 삼성에서도 김응용은 최고의 야구단 CEO로 인정받는다. 그는 사석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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