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일본 조총련잡지에 내부 사상비판 논문공개 - 황장엽 철학 공개 비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황장엽(黃長燁)씨가 망명전 북한에서 당지도부로부터 공개적 사상비판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북측 자료가 최근 공개됐다.

재일(在日)조총련 산하 조선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조선자료'는 6월호에서 지난해 9월 북한 당정책기관지'근로자'에 실린 내부사상 비판 내용의'편집국 논설'을 일본어로 번역,전재했다.

이 논설은“주체철학을 올바로 이해.해석.해설.선전할 때의 유일한 지침은 김일성(金日成)주석과 김정일(金正日)비서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들”이라고 못박고“주체철학을 자의로 해석하거나 기존 철학의 틀안에서 이해하는 편향이 절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경계했다.논설은 또“주체철학에 조금이라도 이색적 철학사조가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黃씨는 이미 95년 3월 친근한 외국학자들에게 배포한'인류의 광명한 미래를 위하여'라는 논문에서 신주체사상을 역설한바 있다.당지도부는 黃씨의 새 사상을'이색적 철학사조'로 규정,黃씨와 그의 추종학자들을 공개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편집국 논설은“우리는 순수한 철학탐구가 아니라 혁명을 하기 위해 주체철학을 연구하고 있다”면서“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혁명을 위한 철학,즉 투쟁의 무기로 삼도록 해야 한다”고 黃씨의 신주체사상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黃씨는'근로자'가 발행된 뒤 3개월이 지난 지난해 11월 쓴 서한에서“나의 이름은 찍지 않고서,그러나 청중이 누구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알 수 있게 비판하고 있다”고 밝힌바 있다.

'조선자료'에는 김정일의 90년 10월25일 담화도 함께 실렸다.이 역시 내부 사상비판 내용으로 사상.노선을 둘러싼 도전이 이미 90년부터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김정일은 이 담화에서“최근 일부 사회과학자들이 주체철학의 독창성과 우월성을 당의 정책적 요구에 따라 올바로 해설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의 포문을 열고 정경(政經)분리.경제우선을 지향한 당내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다.

그의 담화에 따르면 일부 이론가들이 주민생활을 경제생활.사상문화생활.정치생활 세가지로 나누고 각각의 독자성을 강조한 것으로 돼있다.

이에 대해 김정일은“인간이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하게 생활하더라도 사회정치적으로 또는 사상문화적으로 값높은 생활을 할 수 없다면 결코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정치.사상 우선을 분명히했다.

중국이 80년대에 개혁.개방을 본격화하면서 정경분리 방침에 의거,경제우선책을 택한 전례에 비춰볼 때 김정일의 담화는 중국식 개혁노선을 수용치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정일은 90년 이래 줄곧 정경분리 노선을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써왔으며 그 결산이 95년 6월19일 발표한'사상사업을 앞세우는 것은 사회주의 위업수행의 필수적 요구'라는 장문의 논문이다.

黃씨의 망명은 결국 북한의 사상.노선투쟁에서 개혁.개방파가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김정일이 최근'혁명적 군인정신'을 내걸고 정치.사상통제를 강화하는 것은 黃씨와 그 추종학자들이 빚은 사상갈등 과정에서 일어난 이념적 혼란을 막겠다는 고육책으로 보인다. 정창현 기자

<사진설명>

조총련계 조선문제연구소의 잡지'조선자료'97년6월호.황장엽씨가 망명하기 전 심각한 사상비판을 공식적으로 받았음을 확인해 주는'근로자'96년9월호의 편집국 논설과 90년 10월25일의 김정일 담화가 실려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