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03. 내가 만난 사람 - 송요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송요찬 1군사령관(右)과 부관이었던 필자.

 나는 올해로 만 78세가 됐다. 외교관을 꿈꾸던 청년이 전쟁 통에 군인이 됐고, 청와대 근무를 거쳐 스포츠계에 입문해 태권도와 올림픽 운동에 전념했다.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 기억나는 사람들 이름을 모두 쓰라고 하면 아마 수십 회를 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래도 내 인생에 영향을 주고,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몇 분은 꼭 이 지면을 빌려 감사를 전하고 싶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 송요찬 장군이다. 송 장군이 원주 1군사령관이었을 시절부터 육군참모총장·비상계엄사령관·내각수반을 지낼 때까지 나는 그의 전속 부관과 의전 비서관으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송 장군은 헌병사령관이었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한국은행에 있던 금괴를 트럭에 싣고 부산까지 운반해 국가 재정을 살리는데 기여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이 최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방한한 적이 있다. 밴 플리트 8군사령관을 대동하고 수도사단을 방문했을 당시 브리핑을 하던 송 장군이 “Go, Go, Go”라며 북진을 강력하게 주장한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 타임지도 보도했다.

1959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한 뒤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 군의 기획관리제도를 확립했다. 60년 4·19가 일어났을 때 계엄사령관이 된 그는 경무대에서 계엄령을 오전 11시로 소급하려는 것을 반대해 결국 오후 3시로 결정토록 했다. 서슬이 퍼렇던 경무대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도 강단이 대단했다.

자유당의 부패와 부정선거로 민심이 흉흉했고, 군의 비중이 커졌을 때였다. 계엄사령관의 결심에 따라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군인의 본분을 지켰다. 경무대에서 카빈 총탄 10만 발을 요청했을 때도 송 장군이 거절했다. 그때 거절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고려대에 모인 시위대 1900여 명을 해산시킬 때도 “학생은 폭도가 아니다. 방화범을 제외하곤 모두 석방시켜라”고 명령했다. 4월25일 경무대에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민이 원하는 것은 대통령의 하야(下野)”라고 말한 사람도 그였다.

5·16 이후 내각수반을 맡아 일할 때 ‘4대 의혹사건’이 터지면서 군사정권의 젊은 실세들과 충돌했다. 당시 박정희 최고의회 의장이 강력하게 만류하는데도 사임해버렸다. 그의 사임을 발표하면서 박 의장이 “송 내각수반의 공적은 청사에 빛날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62년 1월 ‘군은 민정이양을 하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는 내용의 성명서가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과 관련해 송 장군은 구속 수감됐다. 송 장군은 추운 감옥에서 병에 걸려 오래 고생했고, 80년 미국 병원에서 타계했다. 그의 나이 불과 60세였다.

옆에서 지켜본 송 장군은 ‘참군인’이었다. 전선에 나가 대한민국을 지켰고, 국민과 나라를 사랑했다. 그는 청년 시절의 내가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제시해준 거인이었다.

김운용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