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M&A서배운다>4. 크루프의 티센 인수 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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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실패한 청혼,강간 미수,그리고 약혼.” 지난 3월18일 독일 철강업계 2위 크루프가 1위 티센에 대해 81억달러(7조원)어치 적대적 인수 포문을 열었다가 단 하루만에 철회하고 티센과 합작회사를 만들기로 합의한 사실을 두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렇게 비꼬았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사설에서“독일국민의'컨센서스(합의) 제일주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선제공격은 티센이 시작했어야 마땅했다.우선 덩치로 보면 96년 크루프의 매출 1백64억달러에 비해 티센은 2백80억달러어치나 팔았고 크루프의 조강(粗鋼)생산능력 4백90만에 비해 티센은 9백30만이었다.리스트럭처링(구조조정)의 필요성으로 보더라도 3백여개의 사업부문을 거느리고 있는 티센이 더 절실했으면 절실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사령탑.크루프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출신으로 리스트럭처링과 같은 미국식 경영방식을 선호하는 크로메회장이 지휘하고 있다.

그는 91년에도 노조와 주의회 의원들의 반대에도 경쟁업체였던 회쉬를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인수해 언론에 오르내린 장본인이다.

당시 과격노조원들이 크로메회장의 집앞 잔디밭에서 수주일간 텐트를 치고 시위를 벌였지만 눈깜짝하지 않고 밀어붙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공개매수가 발표되자마자 티센은 거세게 반발했다.

크루프가 제시한 가격이 당시 주가에 60% 프리미엄을 얹은 수준이었으나 티센의 포겔회장은 오히려 합병이 이루어질 경우 수십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노조를 충동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적중했다.티센의 근로자들은 즉각 파업에 들어갔고 인수배경을 설명하려는 크로메회장에게 계란과 토마토를 던지며 격렬히 항의했다.

양사가 소재한 루르공업지역은 실업률이 18%(전국 평균실업률은 12%)에 이르다 보니 주정부도 노조의 요구를 묵살하기가 만만찮았다.노조는 불과 2주전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탄광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려는 정부계획을 실력으로 저지한 적이 있다.결국 반대여론을 등에 업고 주정부가 중재에 나섰다.콜총리조차 적대적 M&A가 가져올 인원삭감등 부정적 여파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크로메회장은 양사의 철강부문만 합치는 합작회사를 설치하기로 합의(현재도 협상이 진행중임)하는 선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독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민간경제활동에 대한 독일정부의 역할은 한국과 비슷하다.

영.미식의 시장원리를 존중하기보다 정부의 육성.후원아래 통제된 경쟁이 일반화돼 있기 때문에 기업.은행.노조.정부를 연결하는 제도적 밀착관계가 경제 저변에 형성돼 있다.

산업구조조정이 시급한 실정이지만 만성변비에 걸린 기업지배구조,외부간섭이 일상화돼 있는 금융시스템,정치인의 기업활동에 대한 간섭,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합의가 없으면 진행되지 않는 전통적 사고가 얽혀 있다.

일본의 닛폰 스틸이나 NKK,한국 포항제철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합병을 통한 감원등 비상조치가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안정이 먼저라는 얘기다.독일의 M&A가 대부분 대주주간의 막후협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권성철 전문위원

<사진설명>

노조 시위대를 만나기전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는 크로메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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