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할리우드벽 넘은 일본 영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신작'뱀장어'를 출품한 일본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71)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부축을 받으며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83년 황금종려상,89년 최우수기술상수상등 칸영화제와 인연이 깊은 이 노감독은 8년만의 컴백에 감회가 깊은 듯했다.그러나 그에게 던져진 첫 질문은“새 작품을 만드는데 왜 그리 시간이 오래 걸렸느냐”는 것이었고,이에 대한 그의 답은“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예산을 확보하기가 힘들었다”였다.

사실 일본은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등 서구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거장 감독들을 배출한 전통적인 영화강국으로 6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그러나 70년대부터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이제는 영화생산국이 아닌 소비국으로의 영향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같은 후퇴의 원인에 대해'뱀장어'제작담당자는“그동안 일본영화인들이 지나치게 돈버는데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할리우드영화에 관객을 빼앗겨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일본 영화인들이 우선 재정상태부터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에로영화 등을 집중적으로 제작했다는 것이다.하지만 이들 싸구려 상업영화는 오히려 젊은 관객들이 일본영화를 외면하는 결과만을 초래했고 그래서“지금은 이런 태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그는 전했다.

이같은 반성의 결과로 등장한 자구책중 하나가 바로 일본영화만을 배급.상영하는 극장체인의 운영이다.일본감독들이 만든 저예산영화에 대해 최소한 50개극장의 개봉을 보장해주는 이 극장체인은 젊은 감독들의 실험정신을 격려하고 원로.중진감독들이 작품성높은 영화를 만들도록 지원해주는게 목표다.

진지한 영화작가들에게 선뜻 돈을 대고자 하는 제작자를 찾기 힘들었던 이마무라 감독이 새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움직임 덕택이다.'뱀장어'관계자들은 칸영화제 본선진출이 젊은 영화관객들의 관심을 다시 일본영화로 모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좋은 영화가 상업성은 떨어지지만 길게 보면 일본영화의 전체적 활력에 보탬이 된다는 점에서'장기적 투자'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와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할리우드와 똑같은 흥행논리가 아니라 격높은 영화전통을 되살리는 쪽에서 찾은 일본 영화계의 깨달음은 마치 눈앞의 흥행에 집착해 가벼운 코미디와 국적불명의 모방작 제작에 급급한 한국영화계에 던지는 충고처럼 들렸다. 이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