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문제 나오면 묵묵부답 - 어려움 많았던 김기섭씨 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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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회 한보특위 청문회에서“이권개입 사실이 드러나면 전재산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김기섭(金己燮)전 안기부운영차장이 결국 유선방송사업자 선정에 개입하고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金전차장의 사법처리과정에서 수사팀은 그의'깔끔한'주변정리로 범죄단서 포착이 어려웠다는 수사기술상의 문제는 물론,알선수재죄와 수뢰죄등 어느 법률을 적용하느냐를 놓고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검찰도 金전차장을 처벌하는 금액이 여론의 기대에 못 미치는 1억5천만원에 불과한 점을 의식한 듯“18일 새벽에야 겨우 참고인 진술과 피의자 자백을 받아냈다”면서“수사팀 내부에서도 한때 사법처리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혐의사실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성호(李晟豪)전 대호건설사장등 金전차장에게 돈을 준 혐의를 받아 온 기업인들이 검찰에서 돈을 준 사실을 극구 부인하는가 하면 일부 기업인은“연말에 인사하려 했으나 金전차장이 거절하는 바람에 돈을 못 줬다”고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수사팀은 한때 보강수사를 위해 金전차장 소환을 늦추는 방안까지 검토했다는 것.4년간 국가 최고정보기관인 안기부의 기조실장.운영차장을 지낸 그가 수사의 맥을 짚고 있는 데다 비자금관리에도 감(感)이 뛰어나 검찰신문의 예봉을 능수능란하게 피해갈 것이므로 섣불리 소환할 경우 자칫 면죄부만 줄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그러나 검찰이 그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4월28일 안기부장과 김현철.김기섭씨 3인의 워커힐호텔 극비회동이 중앙일보에 단독보도된 뒤 金씨에 대한 국민들의 의혹이 증폭됐기 때문으로 보인다.수사팀은 이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金전차장을 조사해 국민들의 의혹을 풀어줄 의무가 검찰에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안기부는 워커힐 회동 전에는 물론 회동사실이 폭로된 뒤에도 직.간접적으로 金전차장의 사법처리에 반대한다는 방침을 검찰수뇌부에 전달해 수사팀이 다소 반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자금추적 과정에서 그가 한솔그룹 조동만(趙東晩)부사장을 통해 관리해 온 비자금이 드러나면서 이 자금의 뿌리를 밝혀 내야 하는 것도 검찰의 부담이 됐다고 한다.金전차장으로부터 돈을 전달받은 趙부사장이 CM기업등을 통해 관리해 온 비자금 규모는 70억원.이성호 사장이 관리해 온 비자금 50억원중 상당액이 현철씨가 기업인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金전차장이 맡아 온 비자금은 출처가 불분명한 상태다.

검찰이 현철씨 소환방침을 확정하고도 金전차장에 대해서는 소환여부를 결정하지 못해 한때'대선자금 비켜가기'수사방침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그러나 검찰관계자는“金전차장이 관리해 온 비자금에 대해서는 현철씨나 金전차장이 입구부터 출구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함구로 일관하고 있어 정밀한 보강조사를 통해 비자금의 성격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권영민.이상복 기자

<사진설명>

심재륜 대검중수부장이 휴일인 18일에도 출근해 중수3과장등 수사팀을 불러 김기섭 전 안기부운영차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등 사법처리 방향을 지시한 뒤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받으며 퇴근하고 있다. 방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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