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低質 노랫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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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92년 봄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대규모 흑인폭동이 휘몰아친 후 언론들은 이 폭동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고 입을 모았다.흑백문제에 대한 여러 각도에서의 분석이 시도됐는데 그중 주목할만한 것이“흑인들의'랩음악'이 폭동을 예고하고 있었다”는 분석이었다.폭동이 발생하기 얼마전부터 백인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담은 흑인가수들의 랩음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 무렵 흑인가수들의 노랫말 가운데는 끔찍한 내용의 것들이 많았다.“어차피 흑인이 매일 다른 흑인을 죽일 바에는/1주일쯤 백인을 죽여보는건 어때”라는 가사가 있는가 하면,경찰관은 보이는 족족 죽여야 한다는 내용의'경찰 살해자'라는 노래가 흑인사회에서 은밀하게 유행되기도 했다.'×같은 경찰'이라는 제목의 노래는“어떤 경관은 생각한다네/흑인 죽이는 것쯤 아무런 상관없다고/그렇다면 경관 한 놈 해치우면 우리도 신나겠지”라는 가사로 백인경찰관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런 노랫말들이 흑인폭동을'예고'했다는 언론의 분석은 다소 잘못된 듯한 느낌이다.폭동을'예고'한 것이 아니라 흑인들의 분노와 증오심을 부추겨 폭동에 점화(點火)하는 구실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대중음악이 그때 그때의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대중정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곡도 곡이지만 대중음악의 노랫말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대중의 머리속을 점령한다.최초의 본격 유행가인'황성 옛터'나'목포의 눈물''타향살이''애수의 소야곡''눈물젖은 두만강'등 일제시대의 대중가요들이 줄기찬 생명력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것도 그 애잔한 곡과 함께 노랫말이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급격한 시대변화에 따라 대중의 정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으니 대중음악도 그에 맞춰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멋대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지난해 5월 가요 사전심의가 폐지된 후 최근'×같은 세상'이라는 가사가 난무하는가 하면 여성의 성욕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노래까지 버젓이 유행하고 있다.그 강력한 전파력을 감안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제동을 걸어야 한다.도무지 큰일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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