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M&A서배운다>3. 크라이슬러와 커코리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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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수중에 현금이 많으면 강도를 만나기 쉽다.기업도 현금이 많으면 '강도'가 덤빌까.95년 크라이슬러의 경우를 보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95년 4월12일 이 회사 최대주주(10% 또는 3천6백만주)이자 라스베이거스 MGM호텔 주인인 커크 커코리언이 주당 55달러,총 2백억달러 공개매수를 발표했다.커코리언이 노린 것은 당시 크라이슬러가 보유하고 있던 75억달러의 현금이었다.

경영진은 경기에 민감한 자동차산업의 성격상 이 정도 현금은 보유하고 있어야 다가올 불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커코리언은 그 목적이라면 많아도 20억달러면 충분하기 때문에 나머지는 배당이나 자사주매입 형태로 주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하여튼 뉴욕 월가는 즉각 반응,크라이슬러 주가가 전날의 39.25달러에서 52.50달러로 폭등했다.

94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날의 커코리언의 행동은 어느정도 예견됐던 일이다.노스웨스트항공 윌슨회장은 크라이슬러 주식 7백여만주를 보유한 한 기관투자가에게 접근,막대한 현금을 썩히고 있는 크라이슬러를 경영진인수(MBO)하자고 제의했다.

MBO는 경영진이 우호적인 대주주를 업고 회사를 인수,비공개 기업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여러가지 규제를 피해 자산의 매각 또는 사업구조조정등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들은 11월 크라이슬러의 발라드 부사장에게 이 계획을 설명했고 곧 이어 최대주주인 커코리언을 끌어들이기로 합의했다.마침 커코리언은 94년초 60달러가 넘었던 크라이슬러 주가가 40달러선으로 하락한데 불만을 품고 경영진에게 압력을 넣는 중이었다.

12월1일 커코리언의 압력에 굴복한 크라이슬러는 누구든 발행주식의 10% 이상을 매입할 수 없다는 독약처방을 수정,15%로 상향 조정했다.이미 10%를 보유한 커코리언이 추가 매입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다.동시에 배당을 60% 올리고 10억달러어치 자사주매입을 결정했다.이 발표로 주가가 50달러를 넘어서자 부담을 느낀 윌슨은 후퇴하고 말았다.

95년들어 자동차 매상이 줄고 주가가 다시 40달러선까지 하락하자 조바심이 난 커코리언은 4월 독자적으로 행동할 결심을 굳히고 크라이슬러 보브 이튼 회장에게 윌슨의 MBO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중을 떠보았다.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한 커코리언은 12일 공개매수를 기습,공표했던 것이다.이에 이튼회장은 즉각“크라이슬러는 매물이 아니다”는 짤막한 보도자료를 내놓았고 24일 열린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커코리언의 제의를 공식 거부했다.

이튼의 방어작전은 커코리언의 자금줄을 막는데서 시작됐다.커코리언이 과연 그 많은 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월가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착안한 것이다.특히 커코리언이 군사(軍師)로 택한 베어스턴스(증권사)에“크라이슬러의 주식이나 회사채 발행시 주간사를 하고 싶지 않느냐”고 으름짱을 놓았다.주판알을 튕겨본 베어스턴스는 1주일후 꼬리를 빼고 다른 대형 증권사들도 눈치만 볼 뿐 나서지 않았다.경영진이 기관투자가들을 접촉,설득작업에 나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커코리언은 공세를 다소 누그려뜨려 주당 55달러의 자사주매입 또는 주당 5달러씩(94년 배당은 1.60달러)의 특별배당등 두 안건을 5월에 열리는 주총에 상정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이턴은 이것도 거부했다.커코리언의 투자원금은 주당 12달러선이므로 이미 엄청난 차익이 발생했지만 문제는 시장에서 한꺼번에 현금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회사가 사주길 바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마침내 5월31일 커코리언은 공개매수를 철회했다.한숨돌릴 찬스를 잡은 이튼은 경영권이 바뀔 경우 고위경영진 전원에게 거금을 지급토록 하는 계약(보통'황금낙하산'이라 불린다)을 채택했다.여차하면 목돈 받고 다 떠나버릴텐데 그래도 인수하겠느냐는 역습이다.

그러나'이기지 못할 싸움은 걸지 않는다'는 커코리언이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 9월에는 의결권 대결로 위협했고 11월에는 이사 한명을 축출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양측의 최종적 타협이 이뤄진 것은 96년 2월.커코리언은 그린메일(적대적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받는 금전적 대가)을 받은 대신 향후 5년간 공격하지 않는다는 우호협정을 맺었다.

권성철 전문위원

<사진설명>

96년형 다지 바이퍼 쿠페 앞에서 포즈를 취한 보브 이튼 크라이슬러 회장.커크 커코리언의 계속된 위협에도 회사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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