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노벨상보다 중요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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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노벨상에 대한 관심은 유별나다싶을 정도로 높다.벌써 10여년 전에'노벨상에 도전한다'는 TV 프로그램이 상당한 인기를 끈 일이 있고,외국 과학자를 초청할 때도 노벨상 수상자가 되면 그 대접의 격이 크게 달라진다.

하기는 우리나라가 이미 선진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고,올림픽에서는 금메달 수로 세계 5위 안에 든 적도 있는데 세계에서 30개국 이상이 수상한 노벨상은 왜 아직도 못 따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일이다.혹자(或者)는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이 창의적인 연구를 해야 할 대학은 방치(放置)하고 연구소 위주의 응용기술 개발만 중시해 왔기 때문이라고도 하고,혹은 아직도 전반적인 연구 여건이 선진국만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보다 여건이 좋지 못한 파키스탄에서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일본의 유가와 박사는 2차대전 패전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여건만 탓할 문제는 아닌 것같다.아무래도 과학자 자신들의 책임도 크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기 전에 한발 물러서서 과연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물론 한국인 과학자가 노벨상을 타면 문화국민으로서의 사기와 자긍심(自矜心)은 크게 높아질 것이다.과거 온 세계가 우리를 얕보고 있던 시대에 적진(敵陣)에서 딴 홍수환 선수의 세계 권투선수권은 국민들의 사기를 높여주었고,유가와 박사의 노벨상은 침체돼 있던 패전 일본의 분위기를 일신(一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홍수환 선수가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다고해서 국민들의 힘이 갑자기 세지는 것이 아니듯이 어느 한 과학자가 노벨상을 탔다고 해서 우리나라 과학계의 수준이 하루아침에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그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기초과학을 비롯한 한국 과학계의 실력을 밑바탕부터 탄탄하게 다져 그 위에 첨단(尖端) 과학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비록 노벨상은 아직 못 탔지만 자신들의 역할은 묵묵한 가운데 충실히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한 예로 국가간 기초과학 수준을 비교하는데 많이 쓰이는 국제 저명 학술지에 수록된 우리나라 과학자들의 논문 수는 지난해 약 7천3백편에 달해 세계 19위로 올라섰다.이는 물론 세계 11위권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제규모 순위엔 아직 못 미치지만 10년전인 86년에 비해 논문 수로는 7배 이상 증가한 것이고 순위면에서도 40위에서 절반 이상 껑충 뛴 실적이다.실제로 과거 수년간 우리나라의 논문 증가율은 세계에서 1~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과는 최근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정책당국과 일선 과학자들의 협력으로 이뤄진 것이다.또한 선진국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방사광 가속기나 원자로등 대형 연구시설들도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기술로 세계적에서 인정받는 최첨단 수준으로 건설됐다.이러한 발전방향에 지난 임시국회에서 통과된'과학기술 특별법'이 그 취지를 살려 잘 운영된다면 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더욱 고무적인 현상은 청소년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과학의 달'로 지정된 지난 4월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여의도에서 개최한 제1회 대한민국 과학축전에는 1주일동안 4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렸고,어린이들의 깜찍한 과학시범행사가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도 과학의 날 치사에서 올해를'과학 대중화의 원년(元年)'으로 선언하고 우수한 청소년들이 과학기술에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정부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만일 이것이 성공한다면 문민정부의 여러 실정(失政)을 뛰어넘는 가장 의미있는 업적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옛말에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지금 우리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 전체가 무기력과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거의 비효율적인 여러 제도를 혁파하고 기술개발로 국가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가고 있다.과거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아폴로 달 탐사 계획으로 미국 국민의 역량을 결집시켰듯이 비전있는 온 국민의 과학화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기(氣)를 모을 수는 없을까.

오세정〈서울대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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