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문제의 핵심은 리더십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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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새해를 맞이한 마음 적잖이 착잡하다.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어떤 집단적 허탈감에 빠져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물론 경제위기가 주 요인일 터다. 벌써 직장을 떠난 친구들도 있고, 졸업을 앞뒀는데도 아무런 대책 없는 제자도 적지 않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경제위기 탓만은 아니다. 정치든, 사회든, 그리고 문화까지도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우리 사회 전체를 짓누르고, 그래서 집단적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문제는 이 집단적 허탈감이 집단적 성마름과 정확히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인터넷에 접속해 신문· 방송, 또는 포털 홈페이지를 열어 보라. 거기에는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사안마다 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하다 못해 치열하게 맞서고 있다. ‘총성 없는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갖는 모임에서 현안을 두고 느닷없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겸연쩍게 헤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면 허탈감과 성마름의 기원은 노무현 정부의 후반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정부라 하더라도 국민의 3분의 2에 가까운 사람들이 지지를 철회하게 되면, 정부 정책에 대한 허탈감과 그에 짝하는 성마른 비판이 커지게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지지율이 구조화되면 집단적 무기력과 분노 역시 구조화된다.

여기에 일종의 악순환이 발생한다. 지지가 취약한 정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조급한 정책을 내놓게 되며, 그것이 성급하게 추진되는 만큼 국민적 합의를 소홀히 하게 되고, 통합이 소홀히 되는 만큼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과 비판은 다시 커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력은 갈수록 오만한 것으로 비춰지며, 국민의 마음속엔 권력 심판의 욕망이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된다. 투표를 통해 집권한 정부로서는 권력의 위임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국민으로서는 그 위임이 선거라는 한 번의 과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책 추진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 속에 이뤄지는 법이다. 이른바 정당성의 위기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2년 전 겨울 노무현 정부를 심판해 이명박 정부를 출범시켰거늘 지난 1년간 이명박 정부는 바로 정확하게 이 길을 따라왔다는 점이다. 비판하면서도 배운다는 말이 있지만, 최고 정치지도자 개인에 의존한 정치 동원 체제인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의 딜레마를 이명박 정부 역시 그대로 안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너무도 솔직했던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정치 및 시민사회에서 이른바 ‘전선’을 허다하게 형성하고 사회 전체를 사회적 강자와 사회적 약자의 ‘두 국민 사회’로 재편해 왔다.

점증하는 경제위기는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래, 정치가 더 큰 문제야’라는 사실 역시 다시 한 번 절감케 한다. 경제위기에 대한 정치적 관리의 위기가 위기의 또 다른 본질이다. 요컨대, 현재 우리 사회는 두 개의 위기 덫에 빠져 있다. 경제위기에 더한 정치위기가 하나라면, 정치사회 내에서 리더십의 위기와 정당정치의 위기가 다른 하나다.

경제위기의 두려움이 집단적 무력감으로 나타나고, 정치위기의 답답함은 집단적 성마름으로 드러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선 그 위기를 관리하고 새로운 해법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적 컨트롤 타워가 더없이 중요하며, 대통령 중심제에선 대통령과 정부가 바로 이 역할을 담당해 줘야 한다. 적지 않은 국민이 이명박 정부의 리더십에 크게 실망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마지막 기대의 끈을 놓고 있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이점에서 ‘그래, 문제의 핵심은 리더십이야’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새해를 맞이해 이명박 정부는 비상경제정부 체제를 운영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문제는 무엇이 이 비상 체제의 핵심이 돼야 하느냐에 있다. 나는 두 개의 ‘아이(I)’, 혁신(Innovation)과 통합(Integration)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혁신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방향이라면, 통합은 정치위기를 타개하는 방향이다. 사회 통합에 기반한 경제혁신이야말로 집권 2년을 준비해야 하는 이명박 정부에 부여된 최대 과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