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대출창구 금융시스템 고장 최악 돈가뭄 애타는 기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대통령이 나서서 시중은행장들을 만나줬으면 좋겠다.재정경제원장관도 단자.종금등 제2금융권 기관장들을 만나 안심시켜야한다.금융기관들이 꼼짝하지 않으니 정작 죽어나는 것은 기업들이다.”(N그룹 자금담당 전무)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만 해도 그래도 낫다.우리같은 소기업은 기댈 곳이 없다.최근 은행에 신용대출을 호소했더니 1백만원까지 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도대체 그 돈으로 뭘 하란 말인가.”(유원산기 鄭相植대표)

한보.삼미 부도이후 은행은 물론 투금.종금사등 제2금융권까지 대출창구가 얼어붙으면서 기업들이 필요한 돈을 제때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사태가 심화되고 있다.

C그룹의 재무담당 상무는 16일 “요즘엔 담보가 있어도 루머에 휩싸이면 대출이 안된다.한보사태로 은행 임직원들이 검찰에 불려간뒤로는 금융기관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일부 은행은 최근 신용이 확실한 기업이 아니면▶대출 담보는 부도날때 다른 업체에 매각하기 쉬운 물류창고등만 골라 잡고▶담보가격도 평가액이 아닌 즉각 처분할 수 있는 가격으로 산정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

K그룹 관계자는“한보.삼미 부도이후 은행들이 대출자료를 예전보다 훨씬 엄격히 요구하는등 돈을 떼일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고 말했다.

자금난 악화소문이 나돈 G,N그룹은 최근 제2금융권으로부터 대출금상환 독촉을 받고 부동산을 헐값에 팔아 상환했다.이들 그룹은 대신 이 금융기관과는 앞으로 거래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중소기업은 더 심각하다.

알루미늄 새시 메이커인 B사는 최근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적금을 해지하려고 은행에 찾아갔다가 혹만 더 붙여야했다.은행측에서“일전에 공장증설때 빌린 15억원을 이 적금으로 상쇄하자”며 추가대출은 커녕 전에 빌린 돈을 갚으라고 독촉해

왔기 때문.

종이상자 메이커인 DK박스의 이대길(李大佶)사장은“상호신용보증기금에 가서 은행대출에 필요한 보증서를 떼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며“적자가 나면 아예 서류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올들어 대부분의 종금사나 신용금고들이 고객으로부터 받은 저축등 수신증가분보다 기업대출등 여신증가분이 훨씬 적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떼일 가능성이 있는 대출금을 적극 회수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엔 최후의 자금조달 수단인 사채시장도 잔뜩 얼어붙었다.

전주들이 A급이 아니고는 기업 어음할인을 기피해 서울 명동.을지로등지의 사채알선업소들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기업들이 은행들이 주축이 된'금융기관협의회'구성을 환영하는 것도 이같은 절박한 상황이 깔려있다.

금호그룹의 이형곤(李亨坤)금융부장은“이 협의회는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엔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은행뿐 아니라 제2금융권까지 모든 금융기관들이 참여해야 실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제언했다.

삼성그룹 재무담당 간부는“지금 한국경제가 위기적 상황에 놓여있고 추가 대형부도 발생시 해외신용도 급락,금융기관 부실화등 경제적으로 큰 악재가 될 것인 만큼 나라경제를 살리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조치라고 본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또“금융기관들이 도와줄 기업을 먼저 선정하면 해당 기업이 자금난을 겪고 있음을 공개하는 셈이 될 것이므로 기업이 먼저 지원을 요청하면 이 협의체에서 검토하는 시스템이 돼야할 것”이라는 대안도 내놓았다. 〈민병관.박영수.고

윤희.김시래.홍병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