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한보수사에 제발 저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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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른바'정태수(鄭泰守) 리스트'에 오른 여야 정치인에 대한 검찰의 소환조사에 정치권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여당,특히 민주계는“모종의 정치적 음모가 깔려 있다”며'음모론'을 제기하고 나섰고 야당은 야당대로“한보와 김현철(金賢哲)수사등 몸통을 가리기 위한 술책”이라고 주장한다.

아예 지난 주말부터는 반발의 차원을 넘어 노골적으로 검찰 수사에'외압'을 가하는 형국이다.한술 더떠'감놔라 대추놔라'며 검찰 수사를'지휘'하려는 모습도 엿보인다.

15일까지 소환조사를 끝낼 방침이란 여권 고위 관계자의 발언이 그것이다.

때문에 일선 수사진 사이에서는“언제는 수사를 왜 안 하느냐고 따지던 정치인들이 이제와서는 딴소리를 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여야 의원들은 4일 대검청사에서 열린 국정조사에서“정태수 리스트를 수사하지 않고 덮어버리는 바람에 모든 정치인이 비리 혐의자로 몰리고 있다”며“명쾌한 수사를 통해 억울함을 벗겨야 한다”고 김기수(金起秀)검찰총장에게 호통까지 쳤다.

그러나 막상 수사가 시작되자 정치권의 태도는 돌변했다.

정치인들의 말바꾸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하는 석연치 않은 태도가 한둘이 아니다.

처음엔“한푼도 안받았다”고 잡아떼다가 돈받은 사실이 밝혀져 풀죽은 모습으로 검찰청사를 나선 정치인들이 당사로 돌아가자마자“검찰이 음모를 갖고 수사한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누가 봐도 볼썽 사납다.

검찰은 거듭해서 공개적으로 천명한 33명외에 추가 조사 대상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끊임없이'+α'설과 함께“검찰이 리스트를 조작하려 한다”며 별도의 명단을 흘리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정치권이 검찰 수사의 초점을 흐리려는 책략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또 14일엔 정치권에서 사법처리 대상 정치인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그러나 과연 정치인들이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자격이나 권한이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굳이 육법전서를 들추지 않더라도 수사 일정과 수사결과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검찰의 고유권한인 것이다.

일단은 차분히 검찰의 수사를 지켜볼 일이다.정치인들의 역할은 만에 하나 검찰 수사가 정도에서 벗어나고 외압에 흔들릴 때 이를 견제하고 바로잡아주는 것이다.정치권이 먼저 나서 수사를 지휘하고 외풍을 일으킨다면 그것 만큼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한 행위도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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