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쁘아종' - 영화평론가 김정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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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쁘아종'

광각렌즈로 본 세상,엇갈리는 인물의 관계,도시문화에 침윤된 젊은이,감각적인 대사.

왕자웨이(王家衛)영화의'상표'다.그 이전에도 이런 장치를 활용한 이가 없지는 않으나 왕자웨이감독만큼 이를 적극적으로 자기 영화의 육신으로 만든 이는 찾기 힘들다.나는 이런 그의 영화가 보기 좋다.아마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이일지라도 왕자웨이 영화가 지난 시대와 획을 그은 새로운 감성을,언필칭 새로운'코드'를 영화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에 대해선 동의할 것이다.

지금 우리 극장가에는 그의 영화를 표절했다,아니다는 논란의 대상이 된 영화들이 있다.박재호감독에 국한시켜서 말하자면'쁘아종'은 표절한 영화는 아니다.단지 그는 왕자웨이에게서 큰 자극,나아가 영향을 받은 듯하다.실내를 비추는 카메라

렌즈나 움직임,인물의 독백과 대사는 왕자웨이 상표와 유사점이 많다.그러나 이것이'쁘아종'을 비판할 중요한 근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냉장고.편의점.주유소와 심야의 오토바이 질주,상실감,타락한 행동과 순수한 심성 대비 따위의 시각적.

서사적 모티브는 90년대 도시 젊은이의 두드러진 일상이다.일상을 그리는 한 이런 세목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비슷한 그림이 눈에 거슬리고 어설픈 흉내가 안쓰럽기는 해도,이건 과도기적 모습일 것이다.우리 영화는 이제 갓 당대 도시의 삶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으니.

'쁘아종'의 문제는 다른데 있다.외양은 새롭지만 속은 새롭지 않다는 것.90년대말 한국의 젊은이가 90년대의 거리를 배경으로 80년대 홍콩.할리우드 B급영화의 해묵은 틀을 따르고 70년대 우리 청춘영화의 저 안이하고 게으른 방황의 공식을 되밟는데,나는 이게 아쉽다.형사 영수의 마약과 서린의 향수,정일의 수면제는 그들의 소외,소통불능상황을 보여주는 현실적 기제이지만 영화는 이를 과거의 관습으로 풀어간다.니체 운운하며 화초를 가꾸고,별을 꿈꾸면서 우주선을 설계한

다는 설정은 미숙한 감상주의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다.부패한 경찰,창부와 소녀 사이를 오가는 여성,순수한 남성캐릭터가 벌이는 후반부의 갈등과 추격은 솔직히 보기가 안타깝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젊은이의 절망과 일탈은 시대를 불문하고 이어져 내려온 청춘의 환부다.요는 그 상처를 어떤 언어로 말하는가에 있다.누구도 그렇게는 쓰지 않은 언어,작지만 내가 본 나만의 세계,나의 해석.관객은 기분좋게 내다볼 수 있는 신선한 예술의 창(窓)을 원한다.

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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