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훈 감독 작품 두편 남기고 불꽃처럼 사라진 34세 영화魂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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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영화감독 이훈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지난해 9월29일 불이 난 록카페'롤링스톤스'에서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 젊은 영화혼이 남긴 영화는 단 두편.93년'달콤한 포로'라는 비디오영화로 데뷔해 극장 개봉작은 94년작'마스카라'뿐이다.그나마 관객 수는 2만명이 안됐다.

하지만 지금 그는'현상으로서' 한국의 컬트가 되고 있다.컬트영화의 정의는'소수의 관객들이 끊임없이 즐기며 광적으로 숭배하는 은밀한 영화로서 장르가 아니고 현상'.그의 영화와 그 자신이 이제 한국의 일부 영화광들에 의해 그 반열에 오르고 있다.

#장면1.영화에 대한 컬트-지난 1월25일 토요일 오후5시,서울 남산중턱 감독협회 시사실에 3백여명의 팬들이 모였다.'마스카라'를 보기 위해.PC통신 하이텔 영화동호인 모임 '영화퀴즈방'이 주최하고 유니텔 영화동호회 '시네시타'가 협찬한 자리였다.이들은 앞으로 수시로 상영회를 갖는 한편 작은 카페를 잡아 비디오로 2편의 영화를 집단감상하기로 했다.그의 영화가 자꾸 보고 싶다는 열성팬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장면2.감독에 대한 컬트-'로드 러너''서울의 찬가'등 그가 남긴 두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현재'삼인조'라는 영화를 찍고 있는 박찬욱감독,'재즈.섹스'라는 작품을 준비중인 윤태용감독등 친구는 물론 이감독이 생전에 참여했던 PC통신 하이텔 영화퀴즈방의 동호인중에도 여럿이 희망중.영화퀴즈방 동호인인 김혜미(23.서울예전 극작과)씨는 그가 제목과 시놉시스(영화 줄거리)만 남긴'악마의 춤''그들만의 법칙''개같은 일요일'등을 시

나리오로 완성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PC통신 하이텔 동호인 모임인'영화''록과 펑크''비틀스'에서는 그가 생전에 통신상에 남긴 글을 모았다가 교재로 쓰는 사람들도 나타날 정도.

#장면3.추모와 컬트의 경계선-이감독의 친구들이 지난해 10월 그가 좋아했던 음악들을 모아 추모앨범을 냈다.생전에 그렇게도 좋아했던 록음악은 저작권 때문에 못내고 대신 즐기던 재즈음악과 목소리를 담고 남긴 사진.글등을 수집해서 재킷에 실었다.제목은 고인이 좋아했던 비틀스의 음반이름을 따'Free as a Bird(새처럼 자유롭게)'.1천개 비매품 한정판으로 폴리그램에서 나온 이 음반은 이미 수집광들의 사냥물.

#장면4.영화'마스카라'-“여자차림으로 지내는 성전환증 남자인 해주는 강간하려던 치한들에게 남자임을 들키고 엄청난 모욕을 당한다.어느날 청부살인을 하던중 피살자를 자신으로 위장한 다음 불을 지른다.성전환수술과 성형수술을 통해 완전

히 새로 태어난 그는 강간 미수범들에게 성기절단등 가혹한 복수를 시작한다.”

#장면5.왜 그는 숭배받는가-'마스카라'는 소재와 내용,형식과 제작양식에서 그가 추구한 영화세계를 읽을 수 있는 주요한 단서이자 팬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된다.줄거리부터 일반영화의 통념을 가볍게 넘어버린다.

여장남자의 복수극이라는 해괴한 소재에 내용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지만 현대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통렬한 비웃음을 쉽게 느끼게 해준다.

할리우드처럼 돈쓰면 영화를 망친다는 신념아래 그는 저예산이라는 제작양식에 미국 B급 영화 전통에 맞춘 허술한 형식을 일부러 취하고 있다.납치범의 황당한 이야기를 다룬'달콤한 포로'도 마찬가지다.한국의 어떤 감독에게서도 아직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영화정신을 외롭게 추구한 고집이 젊은 영화광들을 사로잡는 요인.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나 한국 최초의 컬트가 되 고 있는 것이다. 〈채인택 기자〉

〈이훈감독 연보〉

.62년생.

.90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텔레커뮤니케이션과 졸업.

.일본영화사'동해영상'에 근무.

.귀국후 자신의 시나리오와 연출로 두편의 영화를 만듦.

.95년부터 장편 로드무비'로드 러너'를 준비하던중 세상을 떠남.

<사진설명>

편하고 재미있게,해괴한 유머로 가득찬 캐주얼한 아이디어를 들고 저예산

인디펜던트 영화를 추구한 이훈감독.가운데 사진은 이감독이 만든

영화'마스카라'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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