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사법부, 흔들리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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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양심적 병역 거부'를 둘러싸고 재판부가 혼란에 빠졌다. 한 쪽은 무죄라고 판결을 내려 풀어주고, 다른 쪽에서는 징역을 선고했다. 국민은 "아니 똑같은 죄를 짓고도 한 쪽은 유죄, 다른 쪽은 무죄라니?" 어리둥절하다. 한 사람의 운명이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면 누가 법을 믿고 사법부를 신뢰할 수 있나. 왜 이런 일이 이 시점에 벌어지는 것일까.

*** 헌재, 2년 넘게 결정 미룬 탓

1차적 책임은 헌법재판소에 있다. 이미 2년반 전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기본권'과 '국방의 의무'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옳은지 헌재의 판단을 요청했는데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헌재법에는 사건을 접수한 지 180일 이내 선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으나 강제규정은 아니라고 한다.

법의 위기는 두 방향에서 온다. 한 쪽은 법의 자의적인 해석이요, 다른 쪽은 법의 기계적인 해석이다. 하나는 법조문을 재판관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들쭉날쭉 판결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법조문 자구에 매달려 세상 변화와는 관계없이 융통성없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다. 병역법 재판의 경우도 무죄를 내린 쪽을 보고 "자의적 판단을 했다"고 할 수도 있고, 유죄를 내린 쪽을 보고 "병역법을 기계적으로 판단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양심의 자유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천부 인권인데 병역법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고, 국민이라면 예외없이 병역의무를 지켜야 하는데 자기만의 양심을 내세운다면 누가 군대를 갈 것인가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렇게 상반된 두 가치가 충돌할 때 대법원이나 헌재 같은 상급심이 교통정리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무죄 판결도 일리가 있다. 그 판사는 "우리 사회가 이런 판결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했다"고 말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매년 600여명씩 나와 1만명이 형사처벌을 받았고, 현재도 500명 넘게 수감 중이라는 현실을 눈감을 수 없다. 총을 드느니, 차라리 감옥엘 가겠다고 하니 이런 사람들을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해 주어야 한다는 현실론이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감옥을 택하겠다는 극소수를 우리 사회가 품지 못한다면 과연 민주 사회라 할 수 있느냐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법은 철 구조물이 아니라 우리의 옷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병역법도 철 구조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신축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법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며, 그 나라가 발전해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말이 있다. 나라가 처한 환경과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병역법은 우리의 환경과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 군에 안 가겠다고 손가락을 자르고, 자식의 의심스러운 병역면제 때문에 두번이나 대통령선거에서 낙마하는 나라에서 과연 이런 예외를 인정해줄 수 있느냐다. 통일 후 평화의 시대라면 모를까 우리 안보환경을 무시한 이런 판결은 결국 공동체를 묶는 끈을 끊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라는 우려 역시 설득력이 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쪽을 택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남게 된다. '죽은 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법'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고민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대법원이나 헌재가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면 국민은 법을 지켜갈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고민과 토론의 기회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가치가 있다.

*** '코드' 病이 사법부에도 옮았나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판결이 혹시 이 사회가 앓고 있는 유행병이 사법부에까지 번져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점이다. 이 사회는 지금 '코드'병을 앓고 있다. 행정부는 이미 코드 인사가 장악했다. 입법부는 코드를 지지하는 쪽이 다수당이 되었다. 사법부 역시 코드를 의식한 판결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왜 이 시점에 하필이면 병역법을 훼손하려 하는가. 그 판사가 요즘 힘을 쓰는 무슨 법 연구회 출신이라거나, 병역법에 문제를 제기한 변호사 모임이 대통령과 연관있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헌법재판소는 탄핵결정 때 소수의견을 발표하지 않았다. 떳떳한 일이었는가? 대법원도 노 대통령의 임기 중에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4명 가운데 13명이 바뀌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행정.입법.사법 3부가 코드를 따라가는가.

언론개혁을 한다니 제4부까지 코드 입맛으로 바꾸려는가.

문창극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