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빛과그림자>5. 필리핀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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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필리핀 자유무역항 수비크만.한때 해외주둔 미 해군의 최대기지였던 이곳이 요즘엔 원부자재와 상품을 실어나르는 컨테이너와 화물트럭으로 북적댄다.

2년전 이곳에 진출한 미국의 APT사.인쇄관련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이 회사의 데니 피아노 영업담당부장은“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등 여타 동남아 국가를 생산기지로 검토해 봤지만 세금과 임금면에서 이곳만큼 유리한 곳을 찾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수비크개발청(SBMA)홍보실의 앤서니 레온은“수출입은 모두 면세고 다른 지역에서 총수입의 35%를 부담해야 하는 법인세가 이곳에선 5%에 불과하다”며“숙련된 노동력,능통한 영어구사력등 제반환경이 하이테크산업 유치에 더 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이라고 자랑한다.이처럼 양호한 투자여건을 발판으로 최근 인텔.NEC.히타치.도시바등 내로라하는 선진국 기업들이 잇따라 새 생산기지를 이곳으로 정하면서 투자열기가 필리핀 열도를 후끈 달구고 있다.

피델 라모스 대통령이 정권을 인수하던 지난 92년만 해도 필리핀은'아시아의 환자'라는 오명에 시달렸다.전임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 정권시절에 발생했던 수차례의 친(親)마르코스 쿠데타는 그러잖아도 뜸한 외국기업들의 발길을 돌리게 만

들었으며,엎친데 덮친격으로 92년 피나투보 화산폭발은 필리핀경제를 침체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나“라모스대통령 집권이후 외국인 투자유치정책과 획기적인 규제완화조치가 맞물리면서 경제회복세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 마닐라에서 코리아 비즈니스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안재영(36)사장의 분석이다.

실제로 91년 0.5%에 머물렀던 성장률은 지난해 7%선을 기록했으며 수출증가율도 95년 29%,지난해는 16%를 기록했다.

이같은 괄목할만한 성과 뒤에는 일본의 하이테크기업들이 필리핀의 저임금과 양질의 노동력을 보고 대거 몰려온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필리핀 국가경제개발청(NEDA)의 오필리아 템플로 국장은“대다수 동남아국가들의 성장이 최근 주춤거리고 있지만 필리핀은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말한다.경기호조에 힘입어 가계소득이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중산층 소비도 활기를 되찾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 경제가 헤쳐가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우선 무역적자가 문제다.95년도에 90억달러에 달하던 무역적자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14%선에 이르는 1백20억달러로 늘어났다.연간 38억달러에 달하는 해외 근로자들의 송금으로 메우기엔 벅찬 금액이다.

다른 아시아국가와 달리 GDP의 19%에 머무르는 총저축률(말레이시아의 경우 39%)도 문제다.이는 경제성장에 필요한 재원을 주로 외국자본에 의존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지 경제전문가들은 빈곤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라고 말한다.빠른 성장에도 불구하고 95년을 기준으로 할때 아직도 전인구의 35.5%가 최저생계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경제개발 초기단계에서 심각해지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돈을 겨냥한 납치등 마닐라의 범죄발생률을 치솟게 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한다. [수비크.마닐라=유권하 기자]

<사진설명>

필리핀 신시가지로 각광받는 마가티.도시개발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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