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장미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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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양애경(1956~ ) '장미의 날' 전문

장미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가지 위에
솜털 같은 가시들을 세우고
기껏 장갑 위 손목을 긁거나
양말에 보푸라기를 일으키거나 하면서
난 내 자신쯤은 충분히 보호할 수 있어요
라고 도도하게 말하는
장미의 기분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가위에 잘려 무더기로 쓰러지는 장미꽃들과 함께
축축한 바닥에 넘어졌다



가시를 가진 식물은 대체로 다른 무기가 없다. 그래서 더욱 잔가시들을 잔뜩 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호랑가시나무는 잎이 여릴 때는 여러 갈래로 가시가 돋아 있지만 잎이 크고 두꺼워지면 가운데 가시만 남고 둥그스름해진다. 하지만 그 굵은 가시는 호랑이 등을 긁을 만하다고 하지 않는가. 잔챙이 같은 상처만 일으키는 장미의 날들이여, 가시를 품으려거든 호랑가시나무 잎을 보라.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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