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論>성공한 표절은 無罪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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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90년대의 신 매체인 PC통신엔 아예 상설 게시판이 마련돼 있고,유력 신문과 잡지에 잊을 만하면 등장하며,대중음악 흥행의 총본산인 방송사마저 가끔씩 엄숙하게 고개를 가로젓고,여론에 의해 표절 음악인으로 판명난 한'가수'의'은퇴선언

'까지 나왔는데도 이 보고 싶지 않은 유령은 왜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창궐하는 것일까?

이렇게 많은'관심'이 몰려드니까 그런 추악한'조명'이라도 받아보고자 하는 욕망이 일기 때문일까.아니면 어차피 한국은 일본과 미국의 문화적 식민지이므로 그들의 음악을'진지하게'본받아서'문명개화'를 촉진해야 된다고 믿기 때문일까.그것

도 아니면 원저작자의 제소로 몇배의 배상금을 물고 국가적 망신 이전에 개인적으로 파산당한 예가 아직 없기 때문에 그토록 무모할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이제는 시쳇말로'뜨려면'표절해야 한다는 자조적인 농담이 매니저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사실 표절 시비가 격화된 노래치고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지 않은 노래가 드물 정도가 됐으니 그런 발상을 탓할 것만도 아니다.멀지도 않은 96

년 벽두에 터진 룰라의'천상유애'표절 파문과 이어진 방송사.전 언론의'흥분'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1백만장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바로 이 지점부터 다시 생각해보자.매체는 공기(公器)로서의 소명을 다했는데 문제는 그것을 구매한 어

린 소비자들의 열등한 인식,곧'표절이라도 우리가 좋으면 된다'는 식의 도덕적 불감증에 있는 것인가.

하지만 이들에게 그런 취향을,판단의 마비를 파종한 자는 과연 누구였는가.생방송중에 카메라에 침을 뱉었다고,몰래 대마초를 피웠다고 1년 이상의 방송출연 금지처분을 내리는 방송가의 공익관(觀)은 마땅히 표절 작곡가와 그것을 부른 가수

에 대해서도 똑같이,아니 그보다 더욱 가혹하게 적용됐어야 옳았다.어찌 한 나라의 문화적 주권을 유린하는 예술적 범죄가 다른 스캔들에 비해'죄질'이 가벼운 것으로 쉽게 판정한단 말인가.

룰라는 바로 5개월뒤 모든 방송사들의 영접을 받으며 화려하게 복귀했고 숱한 표절의 행진곡이 이어졌다.97년 시즌의 1분기를 장악하다시피 한 주주클럽의 앨범은 한마디로 표절의 만찬장이다.'이젠 아냐'는 프렌테의'Bizarre Lov

e Triangle'의 번안곡 수준이며,친절하게도 음반 속지에'모티브를 인용'했다는 설명까지 덧붙인'돈이 드니'는 블론디의'Denis'를 모티브만 인용한 차원이 아니라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사용승인을 얻어 리메이크 형식으로 발표해야

할 정도인데도 주주클럽 작곡으로 버젓이 명시돼 있다.더이상 할 말이 없다.우리의 대중음악은 또다시'천상유애'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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