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글밭산책] 정말 값진 건‘지금 이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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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 버린 순간 그리워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고양이 얀과 물고기 카와카마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정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느낌을 나는 아직도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개념이 가지는 모든 을 무릅쓰고, 또 나의 모든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언어관에 대해 십분 양해를 구하고,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어이없음’이었다. 어이없는 책, 그것이 『얀 이야기-얀과 카와카마스』이다.

나는 책을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읽었다. 이 바쁜 세상에 읽은 책을 다시, 그것도 천천히 다시 읽는 일은 요즈음의 나에게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작가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여는 글’서부터 본문을 거쳐 ‘맺는 글’과 ‘진짜 맺는 글’이 이렇게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글도 처음이었다.

“나는 새벽 동틀 무렵의 한가한 시간이 가장 좋다. 바람 소리와, 그 바람에 실리어 온 새소리가 창틈으로 어렴풋이 들어와 내가 앉은 의자 곁에 간신히 이르러 서성거릴 때…그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때일지언정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책은 얀이라고 하는 고양이와 우리말로는 곤들매기류의 한 민물고기라고 멋대가리 없이 번역 되는 카와카마스의 이야기이다. 무대는 러시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혁명의 러시아나 거대한 성당이 있는 러시아가 아니라 그냥 초원이 있고 그냥 강이 흐르고 그냥 “바람이 ‘간신히’ 내 곁으로 오는” 그런 러시아이다.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고양이 얀의 거처에, 어느 날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카와카마스가 문을 두드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카와카마스의 용건은 내일 있을 자신의 영명축일 (러시아 정교회의 영명축일을 ‘이름의 날’로 번역한 것이 이 책의 유일한 흠이다)을 위해 소금하고 버터를 좀 얻으러 온다. 그리고 다음날도 카와카마스는 ‘내일’ 영명축일을 위해 요리에 넣을 사워크림을 빌리러 온다. 카와카마스는 날마다 ‘내일’ 있을 영명축일을 위해 얀에게 가지가지를 빌려간다. 그렇다고 매일 오는 것도 아니다. 어떤 때는 석달 만에 나타나 ‘내일’의 영명축일을 위해 또 무언가를 빌려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대상은 고양이 얀이다.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다 빌려주고-물론 받을 가망이 없다는 것은 독자들도 다 안다- 얀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든 봄과 급작스레 최후를 맞는 여름과 황금빛 가을을 보내고(…)솔체꽃 군락을 짓밟지 않도록 마음을 쓰면서”산책을 하고 겨울을 맞는다. 이야기는 그것뿐이다. 그러고는 이 얀이라는 고양이는 “한 걸음 한 걸음 초원의 비탈길을 오르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나의 마음은 말로는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행복감으로 차올랐다”고 말한다. 정말 이야기가 끝난 것인가 하는 생각에 뒷장을 살펴보니 작가가 숨 한번 크게 쉴 여유를 두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카와카마스는 늘 꾸기만 하고 꾸어간 것들을 갚을 줄 몰라 교활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대가 조금 지쳐있다는 증거다”라고. 그러고는 처방까지 내놓는데 “우선 오늘 하루는 학교를 쉬어라. 회사도 쉬어라. 온 하루를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있어 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우리를 더 밀고 간다. “만일 그대가 카와카마스를 영명축일 핑계를 대는 사기꾼이라 여긴다면 …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보라. 아득히 먼 이국의, 여행지의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면서 그냥 그대로 인생 최후의 날에 칫솔 하나 남기고 떠난다 해도 그것은 그것대로 그대의 책임이다”라고. 그러더니 드디어는 무심히 마지막 비수를 꽂는다. “‘아아, 이런 때야’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저마다 ‘아아, 이런 때야’라는 지나가버린 한 순간을, 슬픔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라고.

나는 책장을 덮고 창문을 열었다. “어이없어” 라고 중얼거리고 싶었지만, ‘자랑스러운 민족과 거리를 갖고 있지 않는’이 일본 작가 마치다 준처럼 나 역시 ‘눈물이 어리고’ 말았다. 고양이 얀은 묻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너는 친구에게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를.

공지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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