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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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원지가 다른 남자와 제법 정답게 통화를 하는 내용이 도청 녹음기에서 흘러나왔다.

“요즘 어떻게 지내?”

원지의 목소리가 약간 들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그래.야,너 만난지도 꽤 된 것 같다.”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친구에게 대하듯이 반말투로 흘러나왔다.이미 남의 마누라가 되어 있는 여자에게 반말로 대꾸하는 이 남자는 누구인가.원지가 친척이 아닌 다른 외간 남자와 반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구환으로서

는 사뭇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환은 동창이라도 유부녀가 되어 있는 여자에게는 이전처럼 반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편이었고,원지 역시 구환의 태도를 본받아 유부남이 되어 있는 동창에게는 반말을 삼가는 편이었다.특히 부부가 함께 참석하는 동창회에서 원지가 다른 남

자 동창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주어 구환은 내심 고맙게 여기고 있는 편이었다.그리고 구환과 원지는 같은 학교 선후배라 서로의 동창관계를 잘 알고 있는데,도청 녹음기에서 재생되는 남자의 목소리는 구환이 처음 듣는 생소한 음성이었다.

“꽤 되기는.한 달도 채 안 되었는데.”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 있잖아.그렇게 따지면 몇만 년이 되는 거야?후후.”

남자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구환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엄살 떨고 있네.전화건 건 말이야,오늘 아침에 이상한 일을 당해서 그래.”

그러면서 원지가 구환에게 전화로 이야기해주었던 내용을 그 남자에게도 들려주고 있었다.이 여자가 왜 실없이 집안일을 이 남자에게 이르고 있는 것일까.아니,실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답답한 일을 당하거나 충격적인 일을 당할

때는 원지가 이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을 털어놓거나 만나서 위로를 받아왔는지도 몰랐다.구환은 원지와 그 남자의 대화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까짓 일을 가지고 뭘 무서워 해?든든한 네 남편 있잖아.”

네 남편이라고?이놈의 자식.구환은 모욕감 같은 것이 엄습해와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 욕설이 뇌까려졌다.

“남편이 있으면 뭘해?새벽같이 출근해서 밤늦게 들어오는걸.주애까지 학교 가고 나면 난 외톨이 신세가 되는걸.혼자 있는데 그놈들이 또 들이닥치면 어떡해?”

“정 불안하면 가까운 파출소와 연결된 비상벨을 설치하든지.요즈음 시범 케이스로 비상벨,그러니까 방범벨을 싸게 설치할 수 있게 해준대.십만원도 안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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