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용 전기시리즈 출판 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우리나라 성인들은 왠지 전기(傳記)를 읽지 않는다.“나 살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에 신경쓸 여유가 있나”는 심리 탓인지“위인전은 애들이나 읽는 것”이라는 편견이 널리 퍼져있다.그런데 올들어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장(巨匠)들

을 폭넓게 조명한'대형 전기 기획물'들이 잇따라 나와 국내 전기문학의 개화를 조심스레 예고하고 있다.

사실 외국에서 전기는 상식을 초월하는 일화나 기행을 재미나게 소개하거나,해당인물의 일생을 통해 당대사회를 되돌아보는등 출판의 핵심장르로 자리잡은 분야.우리로서는 때늦긴 하지만 제자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우선 도서출판 책세상이'위대한 작가들 시리즈'를 선보였다.사랑과 기도의 시인'릴케-영혼의 모험가'를 필두로 세계문학사를 수놓은 대가들을 하나하나 점검한다.릴케편만 해도 7백4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여자아이 옷을 입고 자랐던

어린시절부터 백혈병에 걸려 5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를 충실하게 기록한 연대기다.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4월),프랑스 사실주의 창시자 플로베르(6월)등 연말까지 5권이 나오고 내년엔 매달 한권씩 속간될 예정.

한길사의'로로로 시리즈'도 이미 거론됐던 대형 기획.당초 예정대로면 지난해 나왔어야 하나 다음주말 독자들을 찾아간다.독일 로볼트출판사의'간판 평전(評傳)'으로 니체.아도르노.T S 엘리엇.붓다등을 다룬 10권이 1차분으로 먼저 나

온다.철학사.종교가.탐험가는 물론 영화감독.배우등 대중문화 거목도 포괄한다는 구상.현재 1백10여권이 계약됐다.

과학의 발전과정을 쉽게 이해하는데는 이달말 민음사의 자회사로 출범할 사이언스의'과학자 전기시리즈'가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논리학자'쿠르트 괴델'이 다음달 출간되고 독일 물리학자'슈뢰딩거'등 10여권이 현재 준

비중.시공사도 빠르면 올 상반기중 영국 폰타나출판사가 낸'모던 마스터스 시리즈'(가칭)를 내놓는다.소쉬르.바르트.라캉.마르크스등 20세기 서구학계의'스타군단'을 집결시켰다.현재 마무리 번역작업에 분주하다.

이들 기획은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나왔던 전기들과 달리 특정 주제아래 여러 인물들의 줄기를 잡아주고 있다.그렇다면 출판사들이 왜 갑자기 성인용 전기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세기말이라는 시대조건을 든다.역사의 전범(典範)을 보여주는 인물을 통해 현재의 위치를 재점검한다는 취지다.특히 난세 극복의 지혜를 과거에서 찾는 역사서의 부상을 주요 동인으로 지적한다.

단지 대부분 번역물이라는 점이 아쉽다.책세상의 김광식부장은 “전기작가를 다른 저술가처럼 온당하게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이런 점에서 5월께 나올'위대한 한국인'시리즈(한길사)가 주목된다.일연.원효.나운규

를 시작으로 1백명의 선인을 다룰 계획이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