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대신 즐겨야 ‘기적’ 일어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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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청소년 오케스트라 ‘시몬 볼리바르’가 앙코르 무대에서 베네수엘라 국기 모양으로 디자인 된 옷으로 갈아입고 연주하는 모습. 남미의 열정이 담긴 연주가 모두 끝난 후 이 옷을 벗어 객석에 던지기도 했다. 작은 사진은 이 악단을 만든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 [크레디아 제공]


 “세계적으로 롤 모델이 되고 있는 ‘엘 시스테마’는 한국에 빚지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시몬 볼리바르’의 15일 한국 연주는 부산의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를 위한 것이죠. 이들을 베네수엘라에 공식 초청하고 싶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빈곤층 음악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시스템이란 뜻)’를 만든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69) 박사. 그는 15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세미나 ‘문화예술교육, 예술꽃을 피우다’에 참석, 한국과의 인연을 이렇게 강조했다.

1975년 시작된 ‘엘 시스테마’는 현재 27만5000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회적인 음악 교육 시스템. 여기서 교육받은 더블 베이스 연주자 에딕슨 루이즈(23)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입단했고,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27)은 내년 LA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자리에 오른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현직 지휘자인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 등이 돕기를 자처하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제도다.

잘츠부르크·루체른·본 등의 주요 페스티벌, 카네기 홀 등의 공연장에서 이들의 연주는 자주 울려퍼진다.

◆베네수엘라와 부산의 ‘공감’=‘엘 시스테마’를 통해 만들어진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14·15일 내한 공연을 했다. 아브레우 박사는 이 공연에 부산의 보육원인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단원 70명을 초청했다. “‘엘 시스테마’가 시작할 때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는 79년 보육원 아이들로 꾸려진 연주단이다. 성당의 미사 반주로 시작, 최근에는 지휘자 정명훈,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등과 함께 연주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지휘자가 정면으로 보이는 합창석에 앉아 공연을 지켜봤다.

아브레우 박사는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에 방향을 제시했다. “처음 교육한 아이들이 프로그램을 끝내면서, 아이들의 진로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1세대 아이들을 지도자로 키워 2세대를 배출하는 식으로 이 고민을 해결했죠. 이번에 한국에 온 오케스트라는 3세대 청소년들로 이뤄졌습니다.”

그는 “음악을 이론적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직접 악기를 쥐어주고, 즐기는 법을 실전부터 가르쳤기 때문에 현재의 성과가 나왔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정부·음악가에도 감사”=아브레우 박사는 베네수엘라의 한국 대사관에도 감사를 표했다. “수도 카라카스에서 지방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데 인터넷 기술을 전수하고 네트워크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 한국 대사관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휘자도 언급했다. 대구시향 상임지휘자인 곽승(67)은 ‘엘 시스테마’의 초청을 받아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아브레우 박사는 “훌륭한 한국의 음악가들이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스페인에서 남미와 남유럽 청소년의 연합 오케스트라를 구성했으며, 내년 10월 UN에 전세계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제안할 계획이다.

‘엘 시스테마’에서 탄생한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는 14·15일 공연에서 이 프로그램의 결과를 생생히 보여줬다. 사운드는 힘이 넘쳤고, 해석에는 거침이 없었다. 베네수엘라 국기 디자인의 윗옷을 입은 단원들은 앙코르 연주에서 무대 위를 가로질러 뛰어다니며 춤을 췄다. 현악기 단원들은 의자 위에 올라갔고, 오케스트라 맨 뒷줄의 호른 주자들은 무대 앞쪽까지 뛰어나왔다. 아브레우 박사는 “우리는 단지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다함께 활동을 한다는 즐거움, 소속감과 인생을 함께 가르친다”고 강조했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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