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72. 헤이데이(전성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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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쓴 드라마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 격려 전화를 주었던 신범식 전 문화공보부 장관.

1970년이 밝아올 때 럭키의 창업자 연암 구인회씨가 명을 다했다. 서울 원서동 집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나는 조사를 했다. 기흥 연못가의 장지에 갔고 비문도 써주었다. 고인은 우리나라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 큰 그릇이었다.

뒷날 서울 부흥의 큰 머슴 김현옥 시장이 타워호텔로 각계 명사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열어준 적이 있다. 럭키의 총수가 된 구자경씨가 나를 구석으로 끌고가더니 "아버지 일생을 정리해 주세요"라고 했다.

KBS-TV의 '아버지와 아들'이 100회를 넘었던가. 원고가 늦어지는 바람에 최길호.고은아 등 주연들이 골탕을 먹었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연출가 김연진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많이 졌다. 이 드라마는 용인의 한 부농 호걸이 자식을 기르는 이야기인데, 일제 이후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담으려 했다. 100회 돌파 기념으로 한강 상류에서 벌인 잔치판은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다. 내 작품보다 서너달 늦게 시작한 TBC의 '아씨'가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임희재가 극본을 쓰고, 고성원이 연출했다. 어느 날 신범식 문화공보부 장관이 전화를 했다. "TV 드라마에도 철학이 있더라고 고려대 신일철 교수가 말하더군요. 잘 써주세요."

고마운 이야기다. 방송물을 우습게 아는 일부 콧대 높은 순수문학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나를 들어오라고 했다. 긴장했다. 정보부라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던 시대. 나는 각오하고 정보부로 갔다. 안내인을 따라 7국장실로 가는데 복도에 사람들이 도열해 있었다. 무슨 뜻인가. 7국장은 작달막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을 잘 보고 있습니다. 매번 나라 걱정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 이야기는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보면… 약간 위험하지 않나 걱정이 되더군요. 그럼 유의하셔서 잘 써주시기 바랍니다."

공손했다. 그러나 의연한 주문이었다. 나중에 그가 김일성과 가장 먼저 접촉한 정홍진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서울대 문리대 후배였다. 나는 슬슬 꼬리를 감추면서 마침내 중단하는 기분으로 붓을 놓았다.

가지야마 도시유키가 일본의 당대 최고봉이라는 작가들을 데리고 왔다. 시바타 렌자부로.구로이와 주고.후지시마 다이스케. 워커힐에 묵은 그들은 카지노에서 즐겼다. 이진섭과 나는 청와대 뒤 스카이웨이로 그들을 안내했다. 팔각정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시바타가 중얼거렸다.

"서울은 천국이 아닌가. 마시고 도박하고 껴안을 수 있으니 말이야."

가지야마는 카지노를 좋아했다. 돈이 떨어지면 하우스 측에서 얼마든지 꿔준다고 했다. 덕분에 나도 원고료만 타면 워커힐로 달려가는 버릇이 생겨 꽤 많은 돈을 갖다 바쳤다. 워커힐의 카지노왕 전낙원과 인천 올림푸스의 유화열이 영웅처럼 보이던 시대가 있었다. 서울신문에 연재한 '엽전'은 그들 이야기다. 인천 앞바다 섬에 초현대식 카지노 왕국이 있다는 가공 소설이었다. 너무 앞섰다고들 했다. 카지노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니까. 최완규의 '올인'을 볼 때마다 감개무량했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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