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호 PD의 못다한 '종묘 너구리'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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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아내에게 미안합니다.”

자연다큐멘터리 PD들은 보통 1년 가까이 걸리는 제작기간 내내 거의 집을 등지고 산다.

지난 2일 KBS-1TV'일요스페셜'을 통해 서울 도심 종묘에서 살아가는 너구리의 모습을 전해준 김규효(金奎涍.38.사진)PD도 예외는 아니다.96년 3월부터 12월까지 집은 '가끔 들르는 곳'이었다.한번은 어쩌다가 들어와서는 “너

구리 먹이를 만든다”며 닭내장을 한 양동이 사다가 끓여대는 통에 몇주일동안 집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떠나지 않았다.자연히 아내의 불평이 뒤따랐다.

96년 4월.아내를 종묘로 불러 너구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빌딩 숲속의 손바닥만한 녹지에 야생동물이 산다는 사실이 신기한듯 웃음짓던 아내는 그 뒤 아무런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다.96년 2월.KBS에서 기획회의가 열리고 김PD가 자

연다큐멘터리의 제작을 맡게 됐다.

“92년 늪지대 미생물의 세계를 그린 '우포늪'을 만든 적이 있지만 부담이 컸습니다.다른 방송사들이 워낙 좋은 자연다큐멘터리를 많이 만들었으니까요.소재고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던중“종묘에 너구리가 산다”는 이야기가 들렸다.'도심속의 자연을 그려내자'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오른 김PD는 당장 종묘로 향했다.

“종묘를 찾은 첫날 너구리의 것으로 보이는 배설물을 발견했습니다.소중히 신문지에 싸들고 산림청을 찾았죠.”

전문가의 판정은 '틀림없이 너구리의 배설물'이라는 것이었다.

김PD는 뛸듯이 기뻐했지만 다른 PD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야행성이고 몹시 민감해 여간해서는 사람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야생 너구리를 카메라에 담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하지만 김PD는 어렵사리 너구리 전문가를 한명

찾아내 촬영에 들어갔다.첫 두달은 너구리를 조명에 길들이는데 보냈다.촬영에 충분할 정도로 점차 조명을 밝게 해가는 동안 제작진은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숨어 지냈다.전원이 화장실에 있었기 때문이다.“처음에는 냄새가 심했지만 나중

에는 화장실에서 밥까지 먹게 됐습니다.”

5월이 되어 너구리가 새끼낳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이들의 성장을 하나하나 담기 시작했다.두달쯤 지나자 똑같아 보이던 너구리들의 얼굴까지 구분하게 됐다.

12월까지 촬영을 마치고 편집에 전념하던 올 2월.종묘공원 관리인에게서 전화가 왔다.'죽어가는 너구리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부리나케 달려가보니 일곱달동안 함께 지낸 5형제중 하나였다.눈물이 핑 돌았다.급히 동물병원으로 옮겼지만 이틀 뒤 너구리는 죽었다.“죄책감이 들었습니다.제가 겨울동안 촬영을 계속하며 이들을 살폈더라면 이런 불행은 안당했을 텐데….”

“집사람에게 미안해서…”를 되풀이하면서도 김PD는 다음 자연다큐멘터리 소재를 찾는데 골몰하고 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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