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철학이 부도맞은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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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어느 원로 철학교수는“드디어 플라톤의 철인(哲人)정치가 이 땅에 실현되었다”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대통령이 철학과 출신이라는 사실과 지혜에 의한 철인정치가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오늘

날 사회 모든 부문에서 드러나는 지성적 리더십의 부재(不在)현상은 그 교수의 흥분이'환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무엇보다도 철학계 스스로'철학의 부재'를 고백하고 나서는 상황이니 말이다.

“미

네르바의 올빼미는 해질녘에 비로소 날개를 편다.”

헤겔이 자신의'법철학'에서 한 말이다.여기에는 철학은 시대적인 위기에

직면해 그것을 자양분으로 스스로의 존립을 유지한다는 뜻이

담겨있다.철학을'위기의 학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철학은 어떠한가.한마디로 위기인식이

결핍돼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위기의 시대를 뛰어넘어 유토피아를

제시하지 못하는 철학이란 자신의 존재가치마저 보장받을 수 없다.더욱이

아무런 반성적 고리없이 권

력을 비호하는 철학은 금방 생명력을 잃고 만다.

지금이 바로 그같은'철학의 위기'상황이다.문민정부는 그'문민임'을

방패로 내세워 비판의 화살을 피해갔다.하지만 역설적으로'비판의 부재'로

인해 문민정부는 지금 벼랑에 서 있다.

최근 철학계가'철학의 위기시대에 철학함'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데는 이러한 배경이 놓여 있다.물론 그 시점이 위기현상이 뚜렷이

드러난 연후여서'때늦은 자기성찰'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출발점이 바로

자기비판에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의미부여를 하기에 무리가 없다.

한국철학회 소속 사회와 철학연구회(회장 이삼열)가'한국사회철학의

현황과 전망'을 주제로 토론회를 연 것이 대표적이다.물론 이는

한국철학에 대한 비철학도들의 비판적 충고를 듣는 자리였다.

모임을 주도한 것은 그 특성상 사회적 요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회철학도들이다.이 자리에는'유신'으로 대변되는 70년대 후반에

사회비판을 철학의 주요한 임무로 설정했던 사회철학 1세대

차인석(서울대).이삼열(숭실대)교수를 비롯,

사회철학 전공교수 50여명이 참석했다.

90년대 이후 총체적 경쟁의 원리가 사회운용의 중심축으로 자리잡게 됨에

따라 사회와 개인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설 자리를 점차 잃어왔다.이런

가운데 강단철학은 현실 연관성을 더욱 상실하면서 현학화되었다.반면

다른 인문사회과학 연구

자들 사이에서는 근대성.문화.정보사회.환경등 전통철학에 포괄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들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히 진행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인석교수는 70년대 이후 사회철학을 전공하면서 느꼈던 현실과의

괴리,사이버시대 반(反)문화로서 철학의 존립가능성등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피력해 주목을

끌었다.강내희(중앙대).이기홍(강원대).최성만(이화여대)교수,박영도(서울

대).박태

호(한신대)강사등 비철학 전공 소장 논객들과

이치범(환경운동연합)사무차장.손석춘(한겨레)기자등 사회운동및 저널리즘

종사자 20여명은 철학연구 풍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내놓았다.

'한국의 지성중에 과연 철학자가 있느냐'라는 힐난에서 시작한 이들의

비판은 참석한 철학도에게 차라리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계몽이란 미명아래 너무 오만했다''사회운동에 자기인식을

제공하는데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하고 있다'

'철학은 사태를 봉합하고 정당화하는데 기여했다''철학을 위한 철학만을

해왔다'등이 이날 쏟아진 비판의 요지다.

'현실인식이 대단히 순진하다'는 자기비판도

있었다.이상화(이화여대)교수는“80년대의 사회철학적 시도들이

목적의식의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시민과 철학도의 실존의식까지

움직이는데에 이르지 못한 것은 사회철학적 문제의식의 공동화(空洞化),

현실에 개입할 이론적 역량과 철학 나름의 실천적 방식의 부재

때문”이라며“현재 철학의 위기는 현실과 철학의 차단을 극복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그렇다고 현실과 철학의 이같은 괴리가

현실에 투항함으로써 극복된다고 말하지

는 않았다.

결론은 철학계.비철학계의 구분이 더이상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요약됐다.지금까지 철학에 대한 외부의 압력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이분법적 구분이었기에 그럴만도 했다.오늘과 같은 철학적 무기력 상황이

여기에서 비롯됐음도 사실이다.

철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오히려 외부를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은 역설이다.하지만 결국 철학은 비철학.사회운동을

포괄하는 광범위한'철학적 지식인의 연대'를 통해서만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사진설명>

위기의 시대에 철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철학계

내.외적으로 분분하다.사진은 한보사태로 구속된 정태수씨와 노동법 관련

파업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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