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쉰들러 보고서 제2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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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탈북자 구조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된 저 오스카 쉰들러가 제2신 보고서를 냅니다.지난해 12월14일에 제출한 제1신 보고서를 통해 저는 베이징(北京)주재 한국 대사관이 탈북자의 망명처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그

로부터 불과 두달도 못돼 북한 노동당 황장엽(黃長燁)비서가 이곳 대사관에 나타난 것은 여러분도 다 아시는 일입니다.

黃비서의 망명 동기는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아버지의 사상(주체사상)을 폐기하고 아들의 사상(붉은기 사상)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같습니다.아마 평양에선 '옛것은 사라지라'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그런지 저에게 은밀히 망명의사를 타진해오는 인사가 많습니다.극비리에 전달된 망명동기 가운데 권력서열 20위에서 50위에 드는 인사만 골라 보고해 드립니다.그것은 김정일(金正日)과의 대화록으로 구성돼 있습니다.먼저 권력서열

20위 안에 드는 모 인사.

“경애하는 지도자동지,지금 남조선은 미증유의 국난(國難)에 빠져 있습니다.한보라는 거대기업이 쓰러지기 전에 거액의 뇌물을 뿌렸는데 현 정권의 실세들이 모두 관련돼 있다고 합니다.깨끗한 정치를 한다고 개혁을 외친 정권이 이럴 수 있느

냐고 사람마다 실망과 분노를 토하고 있습니다.거기다 경제까지 곤두박질치니까 이러다 나라가 망하는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온답니다.이럴때 서울을 기습 점령하고 유리한 조건,예를 들면 매년 공양미(供養米)3천만섬을 바치라는 조건으로 휴전

을 하는게 어떨까요.”

“에라,이 멍텅구리야.너같은 맹동분자는 갈테면 가라.”

그래서 이 인사는 망명을 결심했다고 합니다.다음.

“지금 남조선에서는 통일이 늦어지면 통일비용이 너무 커진다는 우려가 팽배하고 있답니다.가령 분단 때문에 과다 지출되는 남북 군사비와 평화배당금으로의 전용(轉用)이 늦어지는데서 오는 기회비용의 누적까지 계산하면 통일비용은 천문학적 숫

자에 이른답니다.이런 사태가 오기 전에 재빨리 우리를 흡수통일하는게 낫겠다는 결론이 나왔답니다.그들이 그런 망측한 결심을 굳히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전면대화 국면으로 전환하는게 어떨까요.”

“에라,이 비겁자야.너같은 패배주의자는 갈테면 가라.”

그래서 이 인사도 망명을 결심했습니다.다음.

“지금 남조선 사람들은 왜 사는지,어떻게 사는게 옳은지도 모르고 그저 둥둥 떠내려가며 산답니다.지역주의.분파주의.학벌주의에 휩싸인 전면 이기주의(利己主義)의 시절에 접어들었답니다.통일은 아예 생각할 짬도 없답니다.이럴때 지도자 동지

가 서울에 나타나 무조건 통일의 대연설을 하는게 어떨까요.”

“에라,이 미친 자야.너같은 환상론자는 갈테면 가라.”

그래서 이 인사도 망명을 결심했습니다.다음.

“한편으론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한편으론 식량을 구걸하는 우리의 외교방식이 들통난 것 같습니다.어떻게 할까요.”

“그걸 왜 나에게 묻나.너같은 무능거사는 갈테면 가라.”

그래서 이 인사도 망명을 결심했다고 합니다.그런데 북쪽 사정을 들을수록 통일을 지연시키는 것이 북쪽의 불가측성(不可測性)인지 남쪽의 무항심(無恒心)인지 분간이 안 가니 큰일입니다.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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