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에 결국 …‘인플레 파이터’이성태 총재도 손 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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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갈수록 침체되는 경기 앞에선 ‘인플레 파이터’도 손을 들었다. 물가 걱정을 앞세우던 한국은행이 본격적인 경기부양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찔끔 내려 보고, 아니면 또 내리던 한은의 체질에 익숙한 시장에서는 0.5%포인트의 인하를 예상했다. 임찬익 한화증권 채권본부장은 기준금리 1%포인트의 인하를 “상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사상 최대 폭의 금리 인하를 결심한 것은 경기 위축이 그만큼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11일 금융통화위원회를 마친 뒤 “최근 경제가 급속히 나빠지고 있어 금리 인하를 몇 번에 나눠 하는 것보다는 과감히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은은 10월 9일(0.25%포인트), 27일(0.75%포인트), 11월 7일(0.25%포인트) 잇따라 기준금리를 낮췄지만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회사채 금리는 연 9%에 바짝 다가섰고, 대출금리의 기준이 되는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도 5%대 중반에서 움직였다.

이유는 돈이 돌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과 기업이 모두 ‘당장 내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현금 확보에 몰두하고 있다. 이게 돈을 계속 잠기게 만들었고, 그 결과 장기 채권으로 흘러갈 돈이 모자라 금리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기업과 개인의 이자 부담이 가벼워지지 않으면 투자와 소비도 위축된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흑자 도산하는 기업, 빚 못 갚는 개인들이 늘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물린 은행들은 부실해져 정상적인 대출을 해줄 수 없게 된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혈관이 막혀 조직의 괴사(壞死) 현상이 일어난다고나 할까.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1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한국은행 금통위원회는 이날 기준금리를 4%에서 3%로 1%포인트 인하했다. [연합뉴스]


이를 막기 위해 한은은 돈의 힘으로 돈을 돌게 하려는 것이다. 기준금리를 확 낮추고, 돈을 연방 풀어 은행 사이의 하루짜리 콜금리→장기 채권금리→대출금리의 순으로 연쇄 인하 효과를 내자는 의도다.

그동안 비판 여론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물가 걱정은 일단 제쳐놨다. 경기 위축이라는 급한 불을 꺼야 하는 판에 옷 젖는 일만 걱정할 수는 없다는 위기감이 든 것이다. 이 총재는 “비상조치를 취해야 하는 ‘심각한 통화신용의 수축기’는 아니지만 그 경계선에는 와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금리의 추가 인하 가능성도 열어뒀다. 다만 어느 선까지 낮출 수 있느냐에 대해선 금통위원 사이에 아직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론상 금리가 너무 낮아지면 금리정책의 효과가 사라지는 ‘유동성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 총재는 “기준금리 3%가 유동성 함정에 빠진 상태는 아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내년 상반기 중 2~2.25%까지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날 한은의 결정은 외부 압력을 의식한 면도 있다. 그동안 한은이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온 것은 상당 부분 한은이 자초한 면이 있다. 특히 미국발 금융위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8월 금리를 인상한 게 한은으로선 큰 감점 요인이 됐다. 이 총재도 “9월 이후의 사태를 예상했더라면 그때 금리를 올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번엔 ‘한은도 한다면 한다’고 보여주는 차원에서 큰 폭의 인하를 결정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이 총재는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게 쉬워 보이지만 나중에 국민경제적 대가를 반드시 치른다”고 말했다. 금리를 과감히 내리기는 한다만 나중에 그 책임을 누가 지나, 하는 경고 반 항의 반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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