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철의 수면 비타민] 잠자다가 주먹질하는 경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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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대 초반의 부부가 수면클리닉을 찾아왔다. 남편을 살펴보니 눈 주위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손에는 상처가 있다. 부인은 남편이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는 인품 좋은 사람인데 1년 전부터 잠을 자다 소리를 지르고 천장을 향해 헛손질을 한다고 했다. 전날 밤엔 자는 도중에 장롱을 주먹으로 쳐 손을 다치고, 소리를 지르며 방 밖으로 나가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 눈 주위를 다쳤단다.

수면은 비렘수면기와 렘수면기가 반복되며 진행된다. 이 중 렘수면기는 꿈을 꾸는 단계다. 이때 뇌에선 낮에 있었던 학습내용과 기억이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꿈은 이런 과정 중에 만들어진다. 낮에 있었던 내용을 모티브로 과거의 기억이 동원돼 희한하고 엉뚱한 꿈, 그리고 왜곡된 꿈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꿈을 꾸는 렘수면기에 신체는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동작 상태가 된다. 악몽을 꾸면서도 도망가거나 움직일 수 없어 끙끙거리며 힘들어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위 사례의 환자처럼 렘수면기에 동작이 통제되지 않는 질환이 ‘렘수면 행동장애’다. 꿈의 내용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져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렘수면 행동장애는 중년 남성, 그리고 60대 이후에 잘 나타난다. 또 잠의 후반기, 주로 새벽 4∼5시쯤 나타나는 특징을 보인다.

행동도 거칠어 함께 자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함께 자다 폭력을 휘두르거나 쫓기는 꿈을 꾸며 도망 다니느라 벽을 들이받는 등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한다. 몽유병이나 야경증과 달리 깨어나서도 악몽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한다.

원인은 뇌교의 손상이나 이상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대뇌에서 내려가는 운동신경이 차단되지 않아 렘수면 시에 행동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렘수면 행동장애가 파킨슨병으로 이행될 수 있다는 점이다. 렘수면을 만드는 뇌교 부위에는 도파민을 만드는 중뇌의 흑질이 위치한다. 이 흑질에서 도파민 생성이 안 되는 병이 곧 파킨슨병이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렘수면기의 손상이 먼저 발생하고, 점차 흑질로 손상이 퍼져 나가 파킨슨병과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으로 진행한다. 실제 렘수면 행동장애 환자의 30%가 파킨슨병 증세를 보인다.

이외에도 알코올·마약 등의 약물 금단, 또는 카페인 중독에 의해서도 유발될 수 있다. 항우울제의 렘수면 억제작용이 행동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항우울제를 복용하다가 갑자기 줄이거나 끊으면 억제됐던 렘수면 행동이 반동하며 나타난다.

질환을 밝혀내는 것은 문진과 수면다원검사를 통해 가능하다. 다만 수면무호흡증이나 기면증 등 다른 수면질환이나 경련성 질환과의 구별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이 질환은 약물이 잘 듣는다.

누구나 꿈이 현실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잠자는 동안 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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