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글씨 1字 1천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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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국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중 한자(漢字)가 가장 아름답다고 자랑한다.자랑의 근거는 한자가 상형(象形)문자며 표의(表意)문자라는데 있다.한글이나 알파벳과는 달리 글자 하나하나에 뜻과 모양이 있으므로 표음(表音)문자보

다는 그 형상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이다.그래서 한자 특유의 서체(書體)를 만든 것이 기원전 1500여년께인 은(殷)나라 때였으며,그 뒤를 이은 주(周)나라때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사상이 싹트기에 이르렀다.그것이 곧 서예(書藝

)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의 미학적인 관점에서는'상형문자이기 때문에 가장 아름답다'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형태를 가진 모든 사물은 표현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답게 보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한글 예찬론자들이'무슨 소리냐.한글이 이 세상에

서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 논리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시대에 궁녀들이 쓰던 한글 글씨체인 궁체(宮體)를 보면 한글의 아름다움도 자랑할만 하다.한글 글씨체의 정통으로 간주되는 궁체는 선이 맑고 곧으며,단정하고 아담한 점이 특징이다.수천년의 역사를 쌓아온 한문서예에 비

하면 그 역사는 보잘 것 없지만 한글서예가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그 까닭이다.

한글서예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간주한 것은 1910년께 남궁억(南宮檍)이 궁체를 바탕으로 펴낸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이 효시였다.하지만 일제(日帝)의 언어말살정책으로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고,해방 이듬해 이철경(李喆卿).김

충현(金忠顯)등의'글씨본'이 나오면서 예술작품으로서의 발돋움이 시작됐다.새로운 형태화도 끊임없이 시도돼 왔고,한문서예에 결코 뒤지지 않는 예술성을 지닌다고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한 영화사가'축제'라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포스터와 자막에 서예가의 글씨를 무단 사용한 것은 엄연한 저작권 침해다.글씨 한자한자에 작가의'혼(魂)과 미의 창조력과 초인적 정열'이 깃들여 있다면 어느 누구도 그 작품을 소홀하게 다뤄선

안된다.서울지법이 서예가에게 글씨 한자에 1천만원씩 2천만원을 지급토록 판결한 것은 당연하다.돈 그 자체보다도 남의 예술작품을 우습게 아는 풍토를 응징하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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