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참회하는 청문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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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으로부터 한보(韓寶)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한 청문회를 개최하겠습니다.먼저 검찰을 증언대에 세우겠습니다.검찰은 한보사태의 진상을 밝혀 냈습니까.”

“밝혀 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런데 위원장님,진상(眞相)과 진실(眞實)과 사실(事實)은 어떻게 다릅니까.”

“진상은 참된 모습이고,진실은 거짓이 없는 것이고,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비슷비슷 하군요.그런데 진실은 언제나 이상하고,사실은 소설보다 기묘하답니다.거기다 때가 이르기 전에 말해버린 진실은 위험한 법입니다.그러니 소설 수준의 기묘함에서 머무르겠습니다.진실 수준의 기묘함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줍니다.검찰은

국민들이 졸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검찰의 답변이 너무 멋지자 이번 청문회에서도 스타가 탄생하는게 아니냐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또다른 스타탄생은 필요없다는 소리가 컸다.88청문회에서 탄생한 스타들이 그후 어떻게 됐는가.낙선.탈당.감옥행등 온갖 형극(荊棘)을 걷

지 않았는가.

“위원장 자격으로 말씀드립니다.이번 청문회는 참회하는 청문회로 만들겠습니다.등장순서는 기업인.은행인.관료.가신(家臣).정치인.지도자로 하겠습니다.먼저 기업인,증언대로 나오기 바랍니다.”

“저는 편취하고 횡령하고 뇌물을 뿌렸습니다.회사를 세우고 내 회사를 상대로 사기를 쳤습니다.뇌물을 줄 때는 007가방에 현금을 가득 넣거나 사과상자에 담습니다.저의 기업운영 방식은 원래가 이렇습니다.저같이 참회하는 기업인 50명만

있어도 이 나라 경제는 탄탄대로를 달릴 것입니다.”

“저 은행인은'깃털'의 전화에도 놀라 수천억원의 대출서류에 도장을 쾅쾅 찍었습니다.외압때문이라고 엄살을 떨었습니다만 수억원을 뇌물로 챙기는 재미도 봤습니다.은행이라는게 알고 보면 전당포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게 한게 바로 접니다.저

같이 회개하는 은행인 45명만 있어도 이 나라 금융산업의 근대화는 문제없을 겁니다.”

“저 관료는 정말 한보사태가 왜 일어 났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만난 적도 없고,결재한 바도 없고,보고조차 듣지 못했으니 알 리 있나요.나중에 알고 보니 하,그것이 국가 기간산업으로 5조원이나 투자됐다고 하는군요.아,바보같은 내 머

리통.저처럼 후회하는 관료 40명만 있어도 이 나라의 국정은 물샐 틈 없을 겁니다.”

“저 가신은 주군(主君)이 칼국수만 먹고 돈 한푼 안받는다고 자랑할 때 그 옆에 넙죽 엎드려 수억원씩을 꿀꺽꿀꺽 먹었습니다.저는 가신이 아니라 간신(奸臣)이었습니다.저같이 통회(痛悔)하는 가신 30명만 있어도 이 나라의 정치풍토는

훨씬 격상될 겁니다.”

“저 정치인은 궁금증을 묻지않고 조사할 것을 덮어주면 수억원씩 생깁니다.개혁 따로,뇌물 챙기기 따로,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기만(欺瞞)행위 때문에 그동안 정말 괴로웠습니다.우리같은 사기꾼은 사라지겠습니다.저같이 고해(告解)하는 정치

인 20명만 있어도 우리 정치는 일류에 들겁니다.”

“저희 지도자는 국민적 분노 앞에 고개 숙입니다.우리 시대를 마감하렵니다.이처럼 고백하는 지도자 10명만 있어도 우리나라의 앞길은 밝을 것입니다.” (수석논설위원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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