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시국수습의 올바른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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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우리나라는 잇따라 터지는 큰 사건에 휩쓸려 목표도,지향도 없이 떠내려 가고 있다.노동법파동에 이은 한보사태로 정부는 구심력을 잃고 국정은 표류하고 있으며,국내 정치상황은 난마(亂麻)처럼 뒤엉켜있다.정권에 대한 심각한 민심이반

속에 국민 각계각층의 불만.불안.불신으로 사회전반이 동요하고 있다.이런 가운데 황장엽(黃長燁)북한노동당비서 망명,이한영(李韓永)씨 피격,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등 큰 사건이 잇따라 터짐으로써 외교.안보분야에서도 새로운 태세확립이 시

급하고도 중대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 우리의 안팎 상황은 엄중하고 심각하다.하루 빨리 내부를 정돈하고 다시 태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보도에 따르면 정부도 최근 일련의 사태에 대한 종합수습방안을 마련해 오는 25일 대통령취임기념일을 기해 대통령담화로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이미 단편적으로 대통령이 여당대통령후보지명을 포기하고,국정을 내각에 대폭 위임한다는 등의 방

안이 흘러나오고 있다.그러나 평소라면 큰 뉴스일 수도 있는 이런 방안도 현상황에서는 비중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다.

우리가 보기에 정부가 시국수습을 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1차 관문이 한보사태의 의혹해소다.한보의혹을 적당히 넘기면서 시국수습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지금껏 여러차례 지적해 왔지만 한보의혹을 해소하자면 거액대

출의 외압(外壓)실체규명과 이에 따른 김현철(金賢哲)씨 관련 의혹의 규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그를 단순히 명예훼손죄 고소인으로서만 조사해서는 의혹이 씻어질 수 없다.그에게 집중된 모든 의혹이 철저한 수사로 철저히 규명(糾明)돼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검찰수사와 함께 대통령은 아들이 세간에 의혹의 대상이

되고 국정개입.인사개입등 끊임없이 잡음을 일으킨데 대해

대통령으로서,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사과해야 마땅하다.아울러 대통령은

한보사태와 같은 정권적 부패와 정책의 실패

가 일어난데 대한 통렬한 책임과 반성을 표명해야 할 것이다.

한보사태에 대한 이런 철저한 수습의 바탕위에서 다음 몇가지 과감한

개혁.개편.반성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대통령 자신의 국정운영방식의 반성과 개선이다.독선.독주하고

오만하다는 비판여론은 한보사건 이전부터 높았다.국회를 경시하고,야당을

무시하고,여당을 바지저고리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높았다.지나친

권력집중으로 내각은 눈치놀음을 하고

사적(私的)인 막후채널 가동으로 공조직을 무력화(無力化)했다는 비판도

높았다.이런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이젠 방식을 바꿔야 한다.

둘째,민심을 떠나게 하고 상황을 이지경으로 만드는데 직.간접으로

관련있는 정부.여당.비서실의 인물들에 대한 엄중한 책임추궁이

필요하다.여론을 거스르는 강경파,직언을 가로막은 측근,날치기

관련자,한보와 관련해 정책.행정적으로 책임있

는 인물,사태가 난 후에도 책임회피에 급급했던 인물 등은 문책이

불가피하다.

셋째,남은 1년의 임기중에는 특정정당의 보스가 아니라 대통령의

직무에만 전념한다는 각오를 밝혀야 할 것이다.정당지도자의 입장에 서는

한 또 다시 정권재창출을 둘러싼 여야정쟁(政爭)에 휩쓸리고 정치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온갖 무리에

빠지게 마련이다.마음을 비우고 다음 정권은 국민선택에 맡긴다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대통령이 만일 이런 몇가지 사항을 수용한다면 구체적인 조치는

순차적(順次的)으로 자연스럽게 취해나갈 수 있다고 본다.가령 권력집중과

1인독주를 막기 위해 내각에 권한과 책임을 대폭 위임하고,여당의 민주적

운영과 국회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해야 할 것이다.또 인위적인 권력누수방지를 위해 억지로

틀어막았던 여당의 대선후보논의와 자유경선도 보장해야 할 것이다.

날치기.한보사태 등과 관련한 정치.도의적 책임추궁을 하자면 광범한

당정개편도 불가피할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시국수습에 필요한 조치를

일일이 다 들지는 않겠지만 한보사태와 아들문제 등에 대한 철저한 수습이

없고서는 이런 조치를 취해

도 자칫 국면호도책(局面糊塗策)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아무쪼록 상황을 직시하고 더 늦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를 간곡하게 당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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