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도는 농협 개혁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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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조합 1196곳에 조합원 240만7000명. 사실상 별다른 견제 없이 막강한 인사권을 휘두르는 중앙회장. 이런 공룡 농협에 대해서는 이명박 대통령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도 혀를 내둘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던 2003년 2월 강원도 춘천 토론회에서 “농협이 센지, 내가 센지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농협은 한호선·원철희·정대근 전 회장 등 1988년 직선제 이후 뽑힌 세 명의 중앙회장이 모두 비리 때문에 처벌됐다. 농민단체에서는 ‘농협이 설립 목적인 농민·농축산업 지원은 뒷전으로 하고, 돈놀이(금융사업)에만 치중한다’는 불만이 나온다. 농협 개혁론은 진작부터 나왔지만 역대 대통령들도 농협에 손대지 못했다. 이 대통령이 농협에 압박을 가했지만 실제 개혁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후퇴한 개정안=농림수산식품부는 9월에 농협중앙회장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농협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중앙회장이 추천하는 농업·신용사업 부문 대표 등을 독립적 인사위원회에서 추천하도록 바꾼 것이다. 회장이 사실상 인사 전권을 갖고 독단적인 운영을 하는 게 비리로 이어졌다는 지적에 따라 이렇게 개정했다.

그러나 지난달 중순 법안을 확정해 법제처에 심사를 맡길 때 이 부분이 빠졌다. 농식품부 측은 “농민이 주인인 농협의 인사 방식을 정부가 법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 반대가 많았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한 농민단체 관계자는 “농민들은 인사추천위를 두는 것에 찬성했다”며 “몇몇 국회의원이 반대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농협이 마음먹기에 따라 각 지역에 지원하는 돈의 규모가 달라지기 때문에 농촌이 지역구인 국회의원들은 대놓고 농협을 비판하지 못한다”고 했다.

농식품부는 회장의 인사권을 축소하도록 농협의 정관을 고치는 것을 검토 중이다.

◆농협, 개혁안 발표했지만=이 대통령이 농협을 질타한 4일 농협은 최원병 중앙회장 주재로 긴급 회의를 하고 지배구조를 바꾸는 등의 개혁안을 내놨다. 주요 내용은 ▶농협을 금융지주사와 유통사업을 주로 하는 사업지주사로 나누고 ▶지주사 대표 임명에 중앙회장이 간여하지 않으며 ▶농기계 임대사업을 확대하는 등 농민 지원을 늘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구조 개선은 일러야 4~5년 뒤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농축산물 구매·판매를 하는 경제사업 부문이 흑자를 내야 가능한 일인데, 경제사업은 지난해만 약 1700억원 적자를 냈다. 흑자로 돌아서는 데 적어도 4~5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농민들도 농협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증권사를 인수하는 등 신용사업에 치중하면서 농민들에게 직접 이익을 주는 농축산물 구매·판매사업은 소홀히 하는 것이 불만을 키웠다. 지난해 10월 농민단체 대표 등 37명은 ‘농협 제자리 찾기 국민운동’을 발족하고 신용 부문 분리를 주장했다. 금융을 떼어 낸 뒤 농협은 본업인 경제사업에 충실하라는 요구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이헌목 농업정책연구소장은 “시간이 흐르면 지배구조 개선이 흐지부지될 수 있다”며 “인사추천위가 각 사업대표를 선임하게 하는 식의 개혁을 바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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