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문화지도>42.한국의 관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국내 최초의 관악기 연주자는 일본 해군 군악대에서 코넷(트럼펫의 일종)을 배워 1882년 9월 귀국한 이은돌(李殷乭).서울 장안에 화려하고 우렁찬 브라스밴드의 연주가 울려퍼진 것은 이듬해 10월 한.독수호 통상조약 체결을 축하하기 위해 내한한 독일 라이프치히함대 해군군악대의 연주가 그 시작이었다.

또 한국인 연주자로 첫 관악합주가 시작된 것은 1902년 9월7일 덕수궁에서 열린 고종황제 탄신 축하연에서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가 이끄는 시위연대 군악대가'대한제국 애국가'를 초연하면서부터다.

시위연대 군악대는 국빈 영접및 환송등 각종 의전행사에서 각국 국가와 행진곡을 연주했고 이같은 전통은 현재 국방부 군악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서양악기중 실용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도입됐으면서도 현악기와 피아노의 강세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분야가 관악(管樂)이다.여러 명의 연주자가 동시에 연주하는 현악기와는 달리 관악기는 2~4명의 연주자가 같은 악기를 맡고 있지만 같은 선율을 동시에 연주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그래서 조그마한 실수도 금방 노출되기 쉬운 만큼 고도의 연주 테크닉을 필요로 한다.

세계 정상급 교향악단의 내한공연에서 우리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관악기,특히 호른과 트럼펫을 자신있게 연주해 청중으로 하여금 조바심과 불안감을 시원스럽게 떨쳐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국내 교향악단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레퍼토리의 고착화 현상도 금관악기의 연주수준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관악기에 고난도의 연주기량과 눈부신 활약을 요구하는 후기 낭만주의 이후의 작품을 연주해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개인기량 못지 않게 앙상블 감각이 뛰어나야 현악기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KBS교향악단의 경우 트럼펫.호른 파트에 중국인 출신 연주자를 영입했고 코리안심포니와 서울팝스오케스트라도 외국인 연주자를 채용했다.관악기 파트의 기량이 떨어진다고 해서 외국인 연주자를 데려오면 그만이라는 위험한 생각이 계속되고 있다.일본 NHK교향악단은 40년전부터 콩쿠르를 통해 단원을 선발한 다음 외국 유학을 보내 우수한 단원을 양성,현재 외국인 단원은 단 한명도 없다.

우수한 관악기 연주자는 하루 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음대 관악전공 지망생들은 초.중.고교 시절 밴드부 활동을 했던 남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그러던 것이 지난해 서울대음대 입시에서 20명 정원의 관악전공에 1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여학생이 입학하는등 관악계에도'여초(女超)'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한국음악협회 발행'한국음악총람'에 따르면 관악인구의 남녀 비율은 현재 3대7 정도.그래서 최근 일부 대학에서는 작곡.성악에 이어 관악 전공에도 남자에게 우선권을 주는 정원제 도입을 검토중이다.

문제는 입시위주의 교육 때문에 과외활동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각급 학교의 밴드부가 대부분 해체됐다는 것.운동회등 각종 교내행사에서 연주를 도맡았던 학창시절의 추억은 옛날 얘기가 된지 오래다.그나마 남아있는 밴드부도 미림여고.은광여고.동두천여상.성덕여상.염광여자정보산업공고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줄어든데다 남자 학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이제는 군악대에서도 현역병이 모자라 여군 하사관을 모집해야 할 정도가 돼버렸다.

롯데월드.에버랜드.서울랜드등 유원지에서 관람객들에게 즐거운 여흥을

선사하는 고적대도 거의 여고 밴드부 출신들이다.각급 학교 밴드부 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전국관악경연대회는 76년 KBS주최로 매년 실시돼 오다

90년 제15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오케스트라 관악기.타악기 파트에서 여성 연주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졸업후에는 남자 못지않은 연주 기량을 보이지만 결혼.출산.육아

때문에 연주자 생활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 오랜 연륜을 쌓은 관악기

앙상블을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래서 지난해 서울대 음악연구소에서 관악기 보급운동을 전개하면서

수도권 5개 학교에 악기를 무상으로 기증,여름방학때 순회강습을

실시하는등 자구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그러나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탈피,브라스밴드 활동을 되살려 관악계의 저변확대를 마련하는게

급선무다.

이쯤 해서 관악의 장르를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관현악단처럼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윈드오케스트라는 목관.금관.타악기로 구성된

대편성의 합주단.관악기를 위해 새로 작곡된 작품 뿐만 아니라 기존의

관현악곡을 편곡해 연주하는게 보통이다.

브라스밴드는 목관악기보다 금관악기에 치중된 편성으로 실내 공연 뿐만

아니라 야외 퍼레이드까지 겸한다.또 금관악기와 타악기만으로 구성된

마칭밴드는 눈길을 끄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연주와 퍼레이드를

겸한다.따라서 관악앙상블은 연주되는 장소나 상황에 따라 악기편성이나

레퍼토리가 천차만별이다.

66년 창단된 서울브라스앙상블(대표 정윤민)은 5년만에 해체됐고

서울윈드앙상블(대표 서현석)과 아카데미윈드오케스트라(대표

강남규).서울윈드젤로소앙상블(대표 구현욱)정도가 활동중이다.또 기업체

소속으로는 린나이콘서트밴드(대표 김정수)등이 활동중이다.또 국방부

군악대와 육.해.공군 군악대는 국군의 날 행사와 함께 매년 1회씩 일반

공연장에서 시민을 위한 정기연주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브라스밴드는 실내외에서 날씨에 관계없이 연주할 수 있다는 기동력

때문에 오케스트라보다 활용가치가 더 높다.

한국관악협회(KBA)산하에는 초.중.고교 밴드부들이 등록돼 매년 1회씩

경연대회를 벌이고 있다.그중 가장 활발한 곳은 제주지부.95년 7월'섬,그

바람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제1회 제주국제관악제를 개최,국내 18개

단체와 일본.홍콩.대만등 해외 6개 단체가 참가했다.

서울 외국인묘지에 잠들어있는 한국 관악의 선구자 에케르트.그의 업적을

기리면서 관악계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기 위해 서울윈드앙상블은 오는

6월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에케르트 추모음악회를 개최한다.한편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연구소에서는 때를 같이해'프란츠 에케르트:그의

음악과 생애'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사진설명>

오케스트라에 화려한 색채와 박진감을 불어넣는 관악 앙상블의 전통은

아마추어 브라스밴드 활동을 통한 저변확대 없이는 불가능하다.관악

앙상블 특유의 기동력을 살려

야외공연.공단 방문공연으로 시민과 호흡을 함께 해오면서 각종 국제

페스티벌에도 참여,관악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서울윈드앙상블은

올해로 창단 23주년을 맞는다.

<사진설명>

관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탈피,각급 학교 밴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지난 95년 7월 제주에서 열린 제1회

제주국제관악제에서 최연소 참가팀으로 주목을 받았던 부안초등학교

관악대의 연주 모습. 〈오동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