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순리(順理)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8강전>
○·야마시타 9단(일본) ●·쿵 제 7단(중국)

제6보(70∼87)=순리에 따른다는 것은 옳은 것일까. 바둑은 매번 ‘순리’라는 두 글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70으로 젖혀 백의 결사적인 침투는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형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백 집은 다 합쳐 40집이 약간 강한 정도. 흑은 우상이 15집이고 71로 잇자 좌변도 20집 언저리로 굳어지고 있다. 우하 일대에서 15집만 나도 백이 안 된다. 선수만 쥔다면 초토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을 텐데 백은 중앙에서 발을 뺄 수 없다.

72의 강수는 그래서 등장한 것인데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쿵제는 일단 73으로 집을 지켜 안전판부터 마련한다. 74로 머리를 내밀 때 비로소 중앙 돌파. 이후 84까지는 거의 필연의 흐름이라 할 것이다. 하나 이 모든 게 ‘필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순리’를 전제로 한 얘기다. 한국류라면, 그 대표 격인 이세돌 9단이라면 벌써 목숨을 걸었고 ‘역리’든 ‘역행’이든 가리지 않고 어디서부턴가 비틀고 흔들었을 것이다.

야마시타의 86은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하는 듯 보인다. ‘참고도’ 백1로 이어야 마땅하지만 흑4로 끊기면 하변 일대가 통집이 되고 만다. 그 코스가 너무 뻔해 86으로 잇자 87의 절단. 올 것이 왔다. 순리를 따르며 참고 참았는데도 죽음의 사신이 눈앞에 들이닥친 것은 어인 일일까.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