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만화로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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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소설가 조정래(右)씨와 만화가 박산하씨가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철교 위를 걷고 있다. 소설 속 왈패 염상구는 열차가 달려올 때 누가 철교 위에서 더 오래 버티나 하는 내기를 통해 벌교 주먹패의 우두머리가 됐었다. [사진제공=박광석(스톤 스튜디오 대표)]

소설가 조정래(61)씨가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일대와 순천시, 지리산 등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동행한 만화가 박산하(37)씨에게 소설의 현장을 구석구석 보여주기 위한 여행이었다. 박씨는 한 출판사(더북컴퍼니)가 오는 10월부터 출간할 10권짜리 '만화 태백산맥'의 그림을 맡았다.

조씨.박씨를 따라 19, 20일 벌교.순천을 다녀왔다. 조씨는 "소설의 현장을 이번처럼 꼼꼼하게 훑어보는 것은 1994년 방송 프로그램 촬영을 위한 여행 이후 10년 만"이라고 말했다. 여행은 조씨의 부인 김초혜(61) 시인과 '태백산맥'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준비 중인 아리랑 TV의 제작진도 함께했다.

19일 오후 2시 보성군 벌교읍에서 순천시 별량면으로 넘어가는 경계인 야트막한 고갯마루.

일행은 '진토재 해발 50m 보성군'이라는 글귀가 적힌 큼지막한 돌 이정표를 등지고 서 있었다. 진토재 고개를 넘어가면 순천시이고, 일행의 앞에는 드넓은 중도 들판이 펼쳐져 있다. 중도 들판은 일본인 '중도(中島)'가 벌교 포구에 20리 길이 방죽을 쌓아 조성한 간척 농지로 소설의 주무대다. 들판 끝자락에 벌교읍이 오밀조밀 작아보이고 그 뒤로 존재산.제석산 등 소설에서 접했던 산들이 물러나 있다.

"지금은 포장도로가 시원스럽게 깔려 있지만 예전 진토재는 꼬불꼬불 소로(小路)로 넘어가는 지금보다 조금 높은 고개였다. 소설 첫머리에서 정하섭이 무당의 딸 소화를 찾아갈 때도 여기를 지나간다."

진토재 아래 편으로 철도 터널이 뚫려 있고, 철로는 완만하게 휘어지며 벌교읍으로 이어진다.

"소설 속에서 빨치산 하대치가 정부군의 열차를 습격해 무기와 식량을 빼앗곤 했던 곳이 바로 이 터널 부근이다. 십여리 떨어진 읍의 정부군 주력이 진압하기 위해 달려왔을 때는 항상 빨치산들이 떠난 뒤였다."

박씨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자 조씨는 "있긴 뭐가 있어. 내 상상력이지"라고 답한다. 조씨는 "진토재 터널은 초등학생 시절 내 놀이터였다"며 "자연 조건과 지형 지물이 소설의 상상력을 낳는다"고 덧붙였다.

여행 일정은 빡빡했다. 조씨는 "빨리 버스 타라, 둘러볼 곳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수시로 다그쳤다. 사실 수백명이 등장하는 200자 원고지 1만5000쪽 분량의 소설 현장들을 나흘 안에 둘러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일행은 첫날 정하섭과 소화가 함께 목욕하곤 했던 현부자집 별장, 중도 방죽, 고뇌하던 지식인 김범우의 대가(大家) 등을 숨가쁘게 돌았다. 이튿날에는 술도가.금융조합 등이 들어서 있던 벌교읍 번화가, 빨치산 해방구였던 율어가 내려다 보이는 주릿재 고개 등을 찾아갔다.

소설 1권에서 48년 10월 하순 정부군에 밀린 염상진과 하대치는 벌교읍을 버리고 오금재를 넘어 도망친다. 20일 오금재를 찾아간 조씨는 박씨에게 "'태백산맥'의 주인공이 누구인 것 같냐"고 질문했다. 대답하지 못하자 조씨는 "10권까지 살아남아 염상진의 무덤을 찾아간 하대치"라고 말했다. 조씨는 "하대치가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봉화가 타올라 어둠을 밝히는 환상을 본 것은 인간다운 삶과 이상을 찾아 끊임없이 나아가게 마련인 인간 존재를 상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씨는 "90년대 초반 읽었던 '태백산맥'의 감동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며 "원작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어린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작업하겠다"고 말했다. 박씨는 90년대 초반 대표작 '진짜 사나이'(전 43권)가 200만부 넘게 팔린 인기 만화가이고 요즘에는 김훈씨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만화로 만들고 있다.

벌교.순천=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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