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천상의 20곡 … 지상의 20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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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앙의 ‘아기예수…’를 지난달 30일 연주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씨(上). 같은 날, 슈베르트의 애잔한 사랑 노래가 피아니스트 신수정, 바리톤 박흥우의 연주로 무대에 올랐다. [크레디아, 모차르트홀 제공]

11월 30일 서울 서초동 모차르트홀. 오후 5시로 예정된 연주회가 15분가량 늦춰졌다. 피아니스트 신수정(66)씨가 바리톤 박흥우(47)씨와 함께 슈베르트의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1823) 악보를 들고 뒤늦게 무대에 섰다. “방금 예술의전당에서 백건우씨의 연주 보고 오신 분이 꽤 되시죠. 천상의 스무 곡을 듣고 오신 분들에게 지상의 스무 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올리비에 메시앙(1908~92)의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1944)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백건우(62)씨의 무대는 이날 5시에 막 끝났다. 신씨는 모차르트홀과 가까운 예술의전당에서 메시앙을 듣고 오는 이들을 위해 시작 시간을 살짝 늦춘 것이다. 슈베르트의 가곡집 역시 20개의 노래 묶음이다. 덕분에 청중은 스무 개로 이뤄진 서로 다른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20세기vs19세기=‘백건우 파워’는 여전했다. 지난해 12월 여덟 무대로 나눈 베토벤 소나타 전곡(32곡) 연주를 매진시켰던 그다. 이번 연주회 역시 일주일 전에 표가 동났다. 현대 음악 연주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백씨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현대 작곡가로 불리는 메시앙의 실험성을 정확하게 표현해 이 열기에 보답했다.

반면 슈베르트의 무대는 19세기 ‘가곡의 제왕’을 연상시키는 서정적이고 익숙한 멜로디로 청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박흥우씨는 비교적 느리고 신중한 표현으로 스무 곡을 이끌었다. 서정 시인 빌헬름 뮐러(1794~1827)가 쓴 가사를 직접 번역, 무대에 영상으로 띄운 신수정씨는 성악가의 독일어 발음을 살려주는 탄력있는 연주로 응답했다.

◆신의사랑vs인간의사랑=백씨는 메시앙의 ‘아기예수…’에 대해 “신이 바라본 세계를 그린 음악”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신중하고 경건한 연주로 이 세계를 재현했다. 제10곡 ‘기쁨의 성령의 눈길’에서 백씨는 거대하고 폭발적인 음향으로 종교적인 열광을 그려냈다. 반복되는 화음·리듬으로 영원한 존재를 표현한 작곡가의 의도를 백씨는 선명한 표현으로 드러냈다. 슈베르트의 작품은 지상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물방앗간의 아가씨를 사랑하는 한 젊은이의 좌절을 그린 가곡집은 세밀한 심리 묘사, 세련된 비유가 돋보인다. 시 속의 화자인 젊은이가 사랑에 들뜨거나 좌절할 때마다 음악도 함께 출렁인다.

문학과 음악의 완성도 높은 결합을 보여준 무대는 유료 관객 90%로 현대 음악의 가능성을 발견한 공연과 함께 11월 마지막 날을 소담스럽게 장식했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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